[황규인의 잡학사전]덩케르크 해변에 영국 공군은 왜 보이지 않았을까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7월 30일 18시 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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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 이 기사는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 신작 영화 ‘덩케르크’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도대체 우리 공군은 어디 있는 거야(Where‘s the bloody air-force)?”

최근 개봉한 영화 ‘덩케르크’에서 독일 공군 루프트바페(Luftwaffe)가 한바탕 폭탄을 쏟아 붓고 떠나자 프랑스 북부 덩케르크 해변에 있던 영국 병사가 이렇게 말하죠.(영화 이름을 이렇게 바꾼 사람이 누군지 몰라도 물러나라! 물러나라! 물러나라! 물러나라! 물러나라!)

정답은 ‘안개 속’이었습니다.

영화가 막을 내릴 즈음 영국 국민들이 귀환병들을 환영하는 와중에도 “대체 공군은 한 게 뭐 있냐”며 핀잔을 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아닙니다. 영국 공군은 정말 많은 일을 했습니다.

이 영화가 소재로 삼은 ‘다이나모 작전(Operation Dynamo)’을 통해 덩케르크 해변에 고립돼 있던 영국 원정군(BEF)과 벨기에군, 프랑스군 등 총 33만8226명이 영국 땅을 밟아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출처: 영국 정부간행물출판국(HMSO) 홈페이지
출처: 영국 정부간행물출판국(HMSO) 홈페이지

이렇게 많은 사람을 전장에서 구해낸 건 당시까지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살아 돌아올 수 있던 건 영국 왕립공군(RAF)이 하늘에서 독일 공군을 물리치며 바다 위를 오간 배 900여 척을 보호했기 때문이죠.

출처: 영국 정부간행물출판국(HMSO) 홈페이지
출처: 영국 정부간행물출판국(HMSO) 홈페이지

영국에서 작전을 전개한 건 1940년 5월 27일부터 6월 4일까지 9일간. 이 기간 영국 공군은 총 4882회(sorties) 출격했습니다. 그 결과 독일 공군기 240기를 격추시키는 동안 177기를 잃기도 했습니다. 그저 공중전 대부분이 해안에서 떨어진 안개 낀 바다 위에서 벌어져 해변에 있는 육군 병사들 눈에 잘 보이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육군 병사들이 볼멘소리를 하거나 시민들이 공군에 불만을 품었던 게 아주 틀린 소리는 아닙니다. 당시 영국 공군 전투기 사령관을 맡고 있던 휴 다우딩 대장(1882~1970)이 “영국 본토 내에 전투기 전력을 유지해야 한다”며 이 작전에 최선을 다하지 않은 건 사실이니까요.

휴 다우딩 대장. 그는 꼬장꼬장한 성격 덕에 ’꽉 막힌 사람‘이라는 뜻을 담은 별명 ’스터피(Stuffy)‘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휴 다우딩 대장. 그는 꼬장꼬장한 성격 덕에 ’꽉 막힌 사람‘이라는 뜻을 담은 별명 ’스터피(Stuffy)‘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다우딩 대장은 다이나모 작전 시작 11일 전인 1940년 5월 16일 윈스턴 처칠 총리(1874~1965)에게 편지를 보내 “(독일로부터 침략을 당한) 프랑스가 아무리 끈질기게 요구한대도 앞으로 영국 해협을 건너는 전투기가 단 한 대도 없도록 보증해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다우닝 대장이 처칠 총리에게 보낸 편지 중 첫 번째 장. RAF 박물관 소장.
다우닝 대장이 처칠 총리에게 보낸 편지 중 첫 번째 장. RAF 박물관 소장.

다우딩 대장이 프랑스를 혐오해 저런 주장을 폈던 건 아닙니다. 이미 프랑스에 건너가 있던 전투기를 너무 많이 잃었기 때문이죠. 당시 영국 공군 조종사 대부분은 ‘초짜’였던 반면 독일 공군에는 스페인 내전에서 경험을 쌓은 베테랑이 즐비했습니다. 어차피 독일이 영국으로 쳐들어 올 테니 그때를 대비하려면 전투기를 최대한 아껴야 한다는 게 다우딩 대장 주장이었습니다.

그는 같은 편지에 “(영국군이 프랑스와 벨기에에서 패배할 경우) 유럽 대륙 전체를 독일이 차지하더라도 영국이 계속 싸워야 한다는 걸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중략) 전투기 전력이 충분하고 해군 함대가 건재하다면 우방국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때까지 우리 영국 혼자서도 전쟁을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사진 출처: RAF 박물관 홈페이지
사진 출처: RAF 박물관 홈페이지

다우딩 대장은 막 세상에 나온 레이더가 군사적으로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은 선구자이기도 했죠. 그는 반대를 무릅쓰고 유럽 대륙 쪽에 있는 영국 남동부에 레이더망을 깔았습니다.

이 레이더망은 뜻밖의 결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영국은 독일군 암호를 해독해 출격 정보를 입수했지만 독일에서는 이 레이더 때문에 정보가 샌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러니 독일군은 암호 체계를 바꿀 생각을 하지 못했고 영국은 더더욱 성공적으로 독일을 상대할 수 있었습니다.

다우딩 장군은 그냥 레이더만 설치한 게 아니라 각지에 흩어진 레이더에서 얻은 정보를 한 데 모으는 중앙 사령부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이게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당시만 해도 전투기 조종사 중에는 ‘하늘의 돈키호테’를 자처하던 낭만주의자(로맨티스트)가 적지 않아 통제가 쉽지 않았습니다.

일본 애니메이션 ’붉은 돼지‘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부터 불과 10여 년 전 조종사들의 세계를 그리고 있습니다.
일본 애니메이션 ’붉은 돼지‘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부터 불과 10여 년 전 조종사들의 세계를 그리고 있습니다.

결과는 대성공. 그가 이렇게 시스템을 만들어 놓은 덕에 그해 7월 10일부터 10월 31일까지 열린 ‘영국 본토 항공전(Battle Of Britain)’은 영국의 승리로 끝날 수 있었죠.

특히 다우딩 장군이 개발을 지시한 것이나 다름없는 ‘스핏파이어(Spitfire)’는 이 항공전을 통해 “영국을 구한 전투기”라는 명성을 얻었습니다. 처칠이 다이나모 작전 이전에 프랑스로 보내려고 했지만 다우딩 장군이 ‘절대 못 보낸다’고 반대하던 전투기가 바로 스핏파이어였습니다.

다이나모 작전 중 비상착륙한 스핏파이어를 살펴보고 있는 독일군
다이나모 작전 중 비상착륙한 스핏파이어를 살펴보고 있는 독일군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전투기 조종사들 활약이 계속되자 처칠은 “인류 전쟁사에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적은 사람들에게 이토록 큰 도움을 받은 적이 없다(Never in the field of human conflict have so many owed so much to so few)”는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 역시 결국 다우딩 장군이 옳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던 겁니다.

전쟁 중 마피아 느낌으로 사진을 촬영한 윈스턴 처칠
전쟁 중 마피아 느낌으로 사진을 촬영한 윈스턴 처칠

그전까지 무적을 자랑하던 독일 공군도 결국 이 항공전에서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독일 군 수뇌부도 영국 본토를 침공하려던 ‘바다사자 작전’을 결국 포기하면서 독일이 손쉽게 승리할 것 같던 제2차 세계대전도 전환점을 맞이하게 됐습니다. 다우딩 장군이 다이나모 작전 때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 영국 본토 항공전은 현재까지도 인터넷 문화에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당시 영국 정부에서 “진정하고 하던 일 계속 하세요”라는 뜻으로 만든 ‘Keep Calm and Carry On’ 포스터(아래 사진)와 문구가 영어권에서 계속 큰 인기를 끌고 있으니까요.



인터넷에서 ‘닥치고 ○○○’이라고 한국어로 쓴 거 보신 적 있으시죠? 그게 바로 이 표현을 과격하게(?) 번역한 겁니다. 여기까지 읽어주시느라 고생하셨다면 이제 닥치고 추천을 눌러주세요!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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