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표의 근대를 걷는다]양화진 외국인묘지, 그 碧眼의 한국 사랑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1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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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포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있는 호머 헐버트의 묘비.
서울 마포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있는 호머 헐버트의 묘비.
 양화진(楊花津). 버드나무 사이로 강물이 출렁였던 한강 나루터. 지금은 사라지고 자동차와 전철이 질주하지만, 이곳 서울 마포구 한강변에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이 있다.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고 항일운동을 펼치다 고문 후유증으로 생을 마감한 어니스트 베델, 고종의 외교 고문으로 독립운동에 몸 바친 호머 헐버트, 연세대를 설립한 언더우드 일가, 이화여대를 설립한 메리 스크랜턴,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하고 결핵 퇴치에 앞장섰던 셔우드 홀, 백정의 해방을 위해 헌신한 새뮤얼 무어, 고아를 위해 일생을 바친 소다 가이치, 배재학당을 창설한 아펜젤러, 배화학당을 세운 조지핀 캠벨…. 역사 시간에 한두 번 들어봤을 법한 이름들. 19세기 말∼20세기 초 낯선 땅 한국에서 한국인을 위해 살아갔던 이방인들이다. 경치 좋은 한강변에 외국인 묘역이 처음 조성된 것은 1890년이었다.

 묘원 초입엔 베델의 묘비가 우뚝 서있고 그 옆에 헐버트의 묘비가 있다. 1886년 스물셋의 나이로 한국에 첫발을 디딘 헐버트. 교육, 선교에 힘쓰다 점차 한국의 정치 현실에 관심을 갖게 됐다. 1905년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세계에 알렸고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 파견을 이끌었다. 일제에 의해 미국으로 추방된 그는 그곳에서도 조선의 독립을 외치며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 한국 땅에 묻히길 원하노라”고 되뇌곤 했다.

 1949년, 헐버트는 광복절 행사에 참석해 달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을 받았다. 86세의 노구였지만 행복한 마음으로 한국행 선박에 올랐다. 7월 29일 한국에 도착한 그는 안타깝게도 여독을 이겨내지 못하고 8월 5일 서울 청량리위생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운명일까. 한국에 묻히고 싶다던 그의 꿈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헐버트가 양화진에 묻혔으나 묘비명은 비어 있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묘비명을 써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차일피일 미루다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묘비명은 세상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그리고 1999년 많은 이들의 노력 끝에 김대중 대통령의 글씨로 ‘헐버트 박사의 묘’, 일곱 글자를 새겨 넣었다. 벽안(碧眼)의 이방인에게 진 빚을 50년 만에 갚은 것이다.

 양화진외국인묘원은 이국적 정취가 물씬 풍긴다. 묘비를 둘러보면 간혹 6·25전쟁 총탄 자국도 눈에 뜨인다. 표면이 벗겨진 묘비도 있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이방인들의 흔적.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이광표 오피니언팀장·문화유산학 박사 kplee@donga.com
#양화진#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호머 헐버트 묘비#항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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