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구자룡]홍콩시위 왜 더 과격해지나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2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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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룡 베이징 특파원
구자룡 베이징 특파원
1997년 7월 1일 0시 홍콩이 영국 식민지에서 중국으로 반환됐다. 반환식을 전후해 현지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은 홍콩의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시아에서 가장 민주주의가 앞선 곳으로 평가받던 홍콩이 공산당 국가의 일부분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막연한 불안과 두려움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일부 주민들은 “홍콩에서 사람과 자본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 아닌가요”라고 되묻기도 했다.

하지만 홍콩 반환 뒤 일부 시민들이 영국이나 캐나다 등으로 이주하긴 했지만 우려했던 ‘엑소더스’는 일어나지 않았다. 중영(中英) 양국이 마련한 ‘홍콩기본법’에 따라 50년간은 일국양제(一國兩制·한 나라 두 체제)가 보장되고 군사와 외교를 제외한 분야에서는 고도의 자치를 인정하는 ‘항인항치(港人港治·홍콩인이 홍콩을 다스린다)’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홍콩 반환 직후 태국 밧화 폭락을 시작으로 아시아에 휘몰아친 ‘아시아 금융위기’를 홍콩이 이겨내는 데에도 중국 대륙은 도움이 됐다. 2004년에는 중국과 홍콩 간에 자유무역협정(FTA) 격인 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CEPA)이 체결돼 홍콩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

반환 이후에도 해마다 홍콩 섬 빅토리아 공원에선 최대 수만 명 이상이 모여 1989년 6월 4일 톈안먼 사태 희생자를 추모하는 촛불 시위가 열렸다. ‘홍콩의 집회=평화적 촛불 시위’라는 인식은 시위대나 경찰이나 마찬가지였다. 경찰과 투석전까지 벌이며 격렬하게 충돌하는 1980년대 한국의 시위 모습은 홍콩 시민들에게 낯선 것이었다.

그러던 홍콩에서 8일 중화권 최대 명절인 춘제(설날)에 폭동이 발생했다. 이날 시위는 경찰이 어묵 등을 파는 전통 노점상을 단속하자 이에 항의하는 과정에서 폭력 사태로 번졌다. ‘본토민주전선’ ‘열혈공민’ 등의 단체가 주도해 오후 10시부터 다음 날 오전 7시까지 철야로 경찰과 육탄전을 벌였다. 죽창과 가스통, 마스크 투구 등으로 무장한 시위대의 공격에 맞서 경찰이 공중에 권총 실탄 2발을 발사한 뒤 시위대에 총을 겨누면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번 시위는 행정장관 직선을 둘러싸고 2014년 하반기에 벌어진 ‘우산혁명’ 때와는 너무 달랐다. 특수경찰까지 동원돼 진압해야 했던 시위 현장의 물리적 충돌의 격렬함보다 더 큰 차이는 주장하는 내용이다.

우산혁명은 홍콩기본법에 보장된 대로 자치를 인정해 행정장관 선출을 완전한 직선으로 하고 여기에 중국도 개입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시위를 주도한 ‘본토민주전선’의 리더 에드워드 렁(25·홍콩대 철학과)은 “중국의 재식민지화를 막기 위해 홍콩 시민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열혈공민’의 웡모 대표(36) 역시 “홍콩 민주주의와 문화, 시스템을 파괴하려는 중국에 맞서 투쟁할 것”이라며 “대만처럼 독립적이 되는 것도 한 해결책”이라고 밝혔다. 본토민주전선의 주장 중에는 ‘반공(反共)주의’도 있다. 자치 보장 요구를 넘어선 주장이다. 공산당 집권하의 중국으로서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홍콩기본법이 보장하는 시한이 다가올수록 ‘중국화 색채’는 짙어질 수밖에 없다. 아직 30년가량이 남았지만 이번 시위는 홍콩 반환 직후 가졌던 정체성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시한이 다가올수록 커지는 것을 보여준다. 반(反)체제 서적 판매와 관련된 인물 5명이 어느 날 증발하듯 사라져 중국 내륙에서 조사를 받고 있는 현실에 대한 좌절감도 느껴진다. 시위가 폭력적이라며 처벌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고 표피적인 대응이다. 홍콩인들에게 미래에 대한 믿음을 줘야 한다.

구자룡 베이징 특파원 bonhong@donga.com
#홍콩시위#우산혁명#홍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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