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이승헌]김정은의 원맨쇼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2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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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헌 워싱턴 특파원
이승헌 워싱턴 특파원
“김정은 혼자 ‘도발 덩크슛 대회’를 하고 있다. 수비수는 없고 심판도 경기장 밖에 있다. 관중석 인민들은 ‘우리 장군님 최고’라며 연신 환호성이다. 진심인지 모르겠지만….”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가 4차 핵실험에 이어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준비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미국 워싱턴의 한반도 전문가 S 씨가 기자에게 한 말이다. 김정은이 한물간 미국프로농구(NBA) 스타 데니스 로드먼을 2013년 북한에 초청할 정도로 농구팬인 것을 빗댄 것이다.

농담에 웃고 말았지만 S 씨 표정엔 웃음기가 없었다. 그는 “김정은 원맨쇼에서 가장 큰 문제는 전담 수비수가 없는 것”이라고 했다. 기자가 “수비수가 미국 아니냐”고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은 북한의 4차 핵실험 후 동분서주하고 있다. 존 케리 국무장관이 지난달 27일 중국 베이징을 방문해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까지 만나 대북 제재에 동참해 달라고 설득했다. 핵실험 후에는 김정은이 두려워한다는 B-52 전략폭격기를 한반도 상공으로 보내 무력시위를 벌였다. 중국 반발에도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의 한반도 배치론을 수면으로 띄우고 있다.

문제는 이런 조치들이 핵실험 후 나온 ‘사후적 억지(deterrence)’라는 데 있다. 전쟁 억지력은 도발을 못 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도발이 끝난 후 대책을 내놓고 있다. 미국은 김정은에게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버스 떠나자 손 흔드는’ 격이다. 도발에 대한 원천 봉쇄와 거리가 멀다. 워싱턴의 많은 한반도 전문가가 미 정부의 정책 우선순위에서 북한 이슈가 뒤로 밀렸다고 지적한 것은 어제 오늘 얘기가 아니다.

그렇다고 미국에 정책 우선순위를 바꿔 달라고, 북한이 딴생각을 못 하게 ‘외과 수술적 폭격’ 가능성만이라도 언급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어려운 현실이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임기를 마무리하느라 정신이 없다. 미 본토에 위협적인 ‘이슬람국가(IS)’를 막는 것도 버거워 보인다. 핵실험 엿새 후 열린 오바마 대통령의 신년 국정연설에서 핵실험의 ‘핵(核)’ 자도 안 나온 것만 봐도 뭐가 우선인지 드러난다.

1일부터 북미 대륙은 본격적인 대선 정국에 돌입한다. ‘세계의 대통령’을 뽑는 선거라지만 대선은 오롯이 국내 정치 행사다. 오바마 행정부의 초기 대북 정책을 주도했던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의 유세에서도 대북 메시지는 들리지 않는다. 도널드 트럼프가 한국의 안보 무임승차론을 거론하다 김정은에 대해 ‘미친×’이라고 욕하는 게 고작이다.

중국은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을 제재할 의사가 없다. 미국은 새 대통령이 취임하는 내년 1월까지 국내 문제로 정신이 없는 상황이다. 사실상 대북 억지력의 ‘진공 상태’다.

이런 상황일수록 김정은의 도발을 막는 것은 우리 몫이라는 게 자명해진다. ‘자주 외교’ 같은 거창한 구호는 필요 없다. 북한의 도발을 원천 봉쇄할 수도 없는 방어체계인 사드의 한반도 배치를 놓고 몇 년째 중국 눈치를 보는 지경이다.

한국 정치권은 김정은의 도발을 남의 나라 일 보듯 한다. 미 의회는 대선 와중에도 대북 제재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런데 새누리당은 총선을 앞두고 유치원생 수준의 ‘진박(眞朴)’ 논쟁에 날이 샌다. 지난해 12월 별세한 스티븐 보즈워스 전 주한 미대사가 생전에 기자에게 한 말이 생생하게 귓전을 때린다.

“한미 양국의 대북 불감증이 심각합니다. 지금 무엇이라도 해야 합니다.”

이승헌 워싱턴 특파원 ddr@donga.com
#김정은#북한#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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