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하 전문기자의 그림엽서]떠난 자, 남은 자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2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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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섭 전 국회의장이 쓴 회고록 ‘나의 정치인생 반세기’.
이만섭 전 국회의장이 쓴 회고록 ‘나의 정치인생 반세기’.
조성하 전문기자
조성하 전문기자
이제 올해 남은 날도 오늘과 내일 이틀뿐. 이즈음이면 너나없이 오고가는 것에 대한 상념이 남다르다. 여행 취재를 전문으로 하는 나는 가끔 이런 짓궂은 질문을 던진다. 떠나는 사람과 남는 사람 중에 어느 편이 되고 싶은지. 순전히 내 직업에서 비롯된 질문이다. 난 늘 떠나는 쪽이었다. 직업상 여행을 밥 먹듯 해야 했기에. 그러다보니 남는 것보다는 떠나는 것에 익숙하다.

그런데 아내는 정반대다. 출장으로 자주 집을 비우는 남편 때문에 늘 남겨졌다. 나는 떠날 때마다 아내에게 미안함을 떨칠 수 없다. 남는 자가 떠나는 자보다 더 힘들다는 것을 알아서다. 떠나는 사람에겐 찾아갈 목적지가 있다. 그러니 뒤를 돌아볼 겨를이 없다. 반면 남는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떠난 이의 빈자리를 돌봐야 하고 돌아오기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나는 내 질문에 답을 못하는 사람에게 늘 이렇게 주문한다. 남겨지지 말고 떠나는 사람이 되라고.

그런데 이번 연말만큼은 나도 남겨졌다. 그러면서 14일 타계한 한 분을 떠올린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이다. 이 말에 고인과 나의 친분이 무척 두터웠을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전혀 그렇지 않다. 평생 단 한 번 만난 게 전부다. 대학 신입생 환영행사에서 선배로 등단해 멋진 응원 솜씨를 보여주는 걸 먼발치에서 본 적도 있고, 기자가 되어 신문사 선후배 사이에 뒤섞여 인사를 나눈 적은 있지만 만났다고 말할 수는 없다.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은 2011년 여름이었다. 동아일보에 게재된 내 칼럼을 읽고 만나자고 연락을 해 와서다.

칼럼은 ‘울릉도 그리고 대통령’이란 제목의 글이었다. ‘이제껏 대한민국 대통령 중에 울릉도를 찾은 이가 한 사람도 없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울릉도와 독도 방문을 공표한 일본 자민당의 돌출 행동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던 우리 정부에 심기일전을 주문한 것이었다. 그 이야기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울릉도 방문을 배경으로 전개됐다. 사실 그때까지 그는 울릉도를 방문한 유일한 대통령이었다. 하지만 울릉도 방문 당시는 5·16군사정변 직후여서 대통령이 아니라 ‘국가재건회의 최고의장’ 자격이었다.

박 의장의 1962년 울릉도 방문은 전격적이었다. 울릉도 출신 한 공무원의 자조가 계기가 됐다. ‘이렇게 내팽개쳐 둘 거라면 차라리 일본에 팔아버리시지요’라는. 박 의장의 울릉도행은 비밀리에 진행됐다. 포항에서 해병대 상륙훈련 참관 후 해군함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울릉도로 가는 도중 선상에서 소동이 벌어졌다. 기자 한 사람이 몰래 탄 것이 발각된 것이었다.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던 이만섭 씨였다. 그때 울릉도까지는 포항서 목선으로 스무 시간 걸렸다. 그러니 돌려보낼 수도 없었다. 그래서 이 기자는 자연스럽게 박 의장의 울릉도 방문에 동행하게 됐다.

고인이 나를 만나려 했던 이유. 내게 당시 상황을 좀더 정확하게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당시 상황을 소상하게 설명하고 그 내용이 기록된 책도 한 권 건넸다. 언론인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한 인생여정을 적은 자서전이었다.

그 칼럼 이후 울릉도에선 몇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1년 후인 2012년 7월, 당시 박 의장이 숙박했던 옛 군수의 관사에 ‘고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그 한 달 후엔 이명박 대통령이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독도를 방문했다.

이 전 대통령의 독도 방문 9일 전. 고인은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본 의원의 울릉도 방문은 어떤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 대통령 스스로 울릉도와 독도를 방문해야 한다’고. 여덟 번의 국회의원, 두 번의 국회의장에 ‘여당 안의 야당’을 자임하며 의회주의자로 올곧게 처신해온 노(老)정치인. 타계 직전엔 국회와 정치인의 작태를 보면 정치 원로로서 부끄럽다며 외출할 때 선글라스를 쓸 만큼 자신에게도 엄격한 선비였다.

이제 그는 떠났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꼬장꼬장한 그 모습도, 확신으로 가득 찼던 그 목소리도 이제 더는 보고 들을 수 없다. 그로 인해 우리는 남겨졌다. 난마처럼 얽히고설킨 현실 때문에 그의 빈자리가 더 커 보인다.

조성하 전문기자 summer@donga.com
#이만섭#정치인#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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