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 박인호의 전원생활 가이드]<29> 2015년엔 ‘풍년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2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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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식이 누렇게 익어가는 올가을의 농촌 풍경. 풍년을 맞았지만 가격이 급락하는 ‘풍년의 저주’에서 벗어나려면 다각적인 대책 마련을 서둘러야 한다. 박인호 씨 제공
곡식이 누렇게 익어가는 올가을의 농촌 풍경. 풍년을 맞았지만 가격이 급락하는 ‘풍년의 저주’에서 벗어나려면 다각적인 대책 마련을 서둘러야 한다. 박인호 씨 제공

박인호 전원칼럼니스트
박인호 전원칼럼니스트
농한기인 한겨울을 맞아 필자가 살고 있는 강원도 홍천의 마을 곳곳을 찾아다녔다. 가급적 많은 농부들을 만나 올 한 해 농사는 어떠했는지 그 과정과 결과를 듣고 배우기 위해서다.

안타깝게도 들른 곳마다 겨울 ‘농한(閑)기’의 여유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고 대신 ‘농한(寒)기’의 시름만이 처마 끝에 매달린 고드름처럼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이 시름의 정체는 다름 아닌 ‘풍년의 저주’였다. 이는 풍년이 들어도 수요가 늘지 않아 농작물 가격이 하락하고 농가소득도 줄어드는 현상을 말하는 것으로, 경제학에서는 ‘풍년의 역설’이라고 한다.

먼저 들른 N면은 배추와 무, 감자 등 고랭지 농업이 활발한 곳으로,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풍작을 맞았지만 가격이 급락해 상당수 농가는 쪽박을 찼다. 몇 년 전에는 남쪽지방과 주산지 지역이 태풍 폭우 등 자연재해를 입은 탓에 반사이익을 톡톡히 누렸었다. 억대 농부가 대거 탄생했고 지역경제도 덩달아 흥청거렸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모습이 온데간데없다.

이어 방문한 S면에서는 농사도 잘 짓고 소득도 꽤 높은 베테랑 농부들을 만났다. 하지만 올해는 이들조차도 풍년의 저주를 피해가진 못했다. 토마토를 재배하는 한 농부는 “올해는 풍년이 들어 수확하느라 일은 갑절 힘들었는데 가격이 하락하는 바람에 간신히 적자만 면했다”고 푸념했다. ‘오이농사 고수’로 통하는 또 다른 농부 역시 “올해는 전국 풍작으로 아주 힘든 한 해였다. 이젠 새로운 소득 작목을 찾아야 할 것 같다”며 농사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문제는 농민의 속을 새카맣게 태운 풍년의 저주가 비단 이들 지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올 한 해 거의 전국적인 현상으로 확산되었다는 점. 쌀 농가는 물론이고 지난해보다 재배면적이 크게 늘어난 채소와 과일 농가의 피해가 더욱 컸다.

올해는 추석 이후 공급량이 급증하면서 가격이 폭락했다. 이런 현상은 38년 만의 일이다. 김장용 배추와 무, 마늘, 양파 등도 마찬가지였다. 가격이 폭락하자 농민들은 자신들이 땀 흘려 농사지은 농작물을 스스로 폐기 처분하기도 했다.

이렇다 보니 차라리 풍년보다는 그나마 가격을 받쳐주는 흉년이 더 낫다는 말까지 나온다. 그러나 흉년이 들면 정부에서 즉시 수입 농산물을 대거 들여와 가격 안정을 꾀하니 흉년이 농부의 소득을 높여주는 것도 아니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남이나 다른 지역은 자연재해나 병충해로 흉년을 겪고 나와 우리 지역만 풍년이 들어야 ‘진짜 풍년가’를 부를 수 있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베테랑 농부들조차도 “농사는 투기”, “너의 불행은 곧 나의 행복”이라는 자조 섞인 한탄을 내뱉는다.

농업기술의 급속한 발전으로 우리 농업은 앞으로도 대형 자연재해만 없다면 ‘풍년의 저주’가 반복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더구나 한-중, 한-캐나다 자유무역협정(FTA) 등 잇단 농산물 시장 개방으로 수입 농산물 또한 갈수록 쏟아져 들어오고 있는 상황이다.

풍년의 저주를 풀 해법을 서둘러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다. 대책으로는 먼저 직거래 활성화, 수출시장 개척 등을 통한 판로 확대를 들 수 있다. 특히 국내 소비가 정체되거나 감소하는 상황에서 수출에서 활로를 찾아야 한다는 지적이 공감을 얻고 있다. 다만 전시성·일회성 수출이 아니라 농산물 고급화와 가공 판매 등 고부가 수출산업의 기반 구축이 선결되어야 한다는 게 현장의 목소리다.

농업 전문가들은 농산물 가격 안정을 위해서는 계약재배 확대와 주요 품목별 출하량을 관측·조절할 수 있는 시스템을 서둘러 구축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중기적으로는 주요 작물의 재배와 작황, 공급과 수요 등의 정보를 실시간으로 공유할 수 있는 시스템 구축도 필요하다.

이와 관련해 농산물 수급 조절과 같은 복잡하게 얽힌 문제를 해결해 나가려면 전담 공무원이 쭉 그 일을 맡아 처리할 수 있도록 일종의 전문관 제도 등을 도입해 전문성을 높여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필자가 겨울 농한기에 만나 본 농업의 현실은 냉엄했다. 2009년 점화된 신 귀농귀촌시대가 2015년이면 어느덧 7년차에 접어든다. 인생 2막의 새 터전으로 귀농을 준비 중인 예비 농업인들은 농업·농촌의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필요해 보인다. 을미년 새해에는 풍년의 저주에서 벗어난 우리 농업·농촌의 모습을 보고 싶다.

박인호 전원칼럼니스트
#새해#풍년#농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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