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321>몸을 굽히지 않는다면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0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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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굽히지 않는다면
―문태준(1970∼ )

노랗게 잘 익은 오렌지가 떨어져 있네
붉고 새콤한 자두가 떨어져 있네
자줏빛 아이리스 꽃이 활짝 피어 있네
나는 곤충으로 변해 설탕을 탐하고 싶네
누가 이걸 발견하랴,
몸을 굽히지 않는다면
태양이 몸을 굽힌, 미지근한 어스름도 때마침 좋네
누가 이걸, 또 자신도 주우랴,
몸을 굽혀 균형을 맞추지 않는다면       
       

‘노랗게 잘 익은 오렌지가 떨어져 있네/붉고 새콤한 자두가 떨어져 있네/자줏빛 아이리스 꽃이 활짝 피어 있네’, 아마도 풀밭 위에. 무르익은 과실들과 흐드러진 아이리스 꽃의 향기가 코를 찌른다. 색채감 짙은 이 황홀한 그림은 시인의 감각이 불러낸 것이리라. 수확 철도 다른 오렌지와 자두가 한 장소에 떨어져 뒹구는 건 사실과 부합하지 않으니까. 아니, 어쩌면 탐미적인 조경사가 꾸며낸 실제 정원일까. 시선을 천상이 아니라 지상에 두고, 그리고 더 가까이 보려 자주 ‘몸을 굽혀’ 별별 아름다운 걸 발견하고 줍는 시인이어라.

오렌지와 자두, 그 진한 향기와 산미가 무감각해진 몸을 자극해 오감을 깨운다. 이 감각의 성찬에 독자도 ‘곤충으로 변해 설탕을 탐하고 싶네’. 아니, 어느 새 시의 단맛 꿀맛에 홀딱 빠져든 곤충이 되네! 슬픔과 고통과 번민의 자욱한 안개 속에서 머리를 싸매고 가슴을 죄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대개 시간이리라. 그래서 자신 속에 그런 게 있는 줄도 모르게 된, 생의 유열에 대한 감각을 찾아주는 게 예술의 중요한 기능 아닐까. 맛있는 것을 향한 곤충의 단순하고 강렬한 식욕처럼 그 어떤 것도 말리지 못하게 내닫는 원초적 욕망을 향유하는, 그런 호사가 잠깐잠깐 한순간이나마 인간에게는 필요하다. 그래야 균형을 맞춰 쓰러지지 않으리라. 이 시는 독자에게 그런 호사를 선사한다.

문태준 시는 이미지도 선명하지만 어휘와 어조와 리듬이 특히 감미로움에서 발군이다. 읊조리노라면 혀에 착착 달라붙는 듯하다.

황인숙 시인
#몸을 굽히지 않는다면#문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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