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키 한탄한 적 많았지만 돌이켜보니 축복이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3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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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석 기자의 스포츠 인생극장]<13>땅콩골퍼 김미현

“김미현 요즘 뭐해요.” 주위에서 이런 질문을 자주 듣는다. 필드를 떠났어도 아직 ‘땅콩 골퍼’의 안부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다.

2012년 가을 은퇴한 김미현(37)은 인천 남동구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김미현 골프월드 연습장이라는 골프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다. 최근 62일 동안 중학생부터 프로에 이르는 선수 7명과 베트남 전지훈련을 다녀오기도 했다. “애를 키우다 보니 남의 아이들도 내 자식 다루듯 무척 신경이 쓰인다. 남의 자식 귀한 줄 알게 된 것 같다.” 그녀를 만나러 가는 날, 골프 연습장 입간판에 새겨놓은 땅콩 그림이 예전보다 크게 느껴졌다.

○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김미현은 부산에서 초등학교 6학년을 다니던 1988년 골프를 시작했다. “골프장 부킹이 별 따기만큼 어려웠다. 오전 4시에 아빠와 차로 1시간 30분 떨어진 경북 경주의 대중골프장을 1주일에 5번씩 다녔다. 비가 올까봐 잠 못 이룬 적도 많다. 아빠보다 먼저 일어나 준비했다.” 김미현은 1996년 맹장수술도 미룬 채 한국여자오픈에 출전해 우승컵을 안은 뒤에야 병원을 찾았을 정도로 독종으로 유명했다. 그는 스파르타식으로 상징되는 혹독한 훈련을 감내했다.

하지만 이런 사연은 가슴속에만 간직하고 싶다고 한다. 요즘 세대에게는 먹히지 않을 레퍼토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선수 지도가 참 어렵다. 우리 때와는 참 다르다. 선수들이 말을 잘 듣지 않을 때에는 스트레스를 받지만 무조건 강요만 할 수도 없다. 눈높이를 맞추려 한다. ‘이런 것도 못해’라는 식으로 감정을 내세우지 않겠다고 스스로 약속했다. 선수 부모님 마음까지 헤아려야 한다. 시범 위주로 하는데 실력이 늘 때 가장 흐뭇하다.”

이제는 선수에서 지도자로 인생을 바꾼 김미현은 바꾸지 않은 신념이 있다면 ‘노력하는 자를 결코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이라고 한다.

○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낮았더라면…

김미현의 키는 155cm. 작은 키는 프로골퍼로는 치명적인 핸디캡이다. 게다가 과거 6300∼6400야드이던 골프장 전장이 6700야드 정도로 늘어나 장타자에게 유리한 환경으로 바뀌었다. 그녀가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에서 거둔 8승이 땀과 눈물의 결정체로 평가받는 이유다.

LPGA투어 통산 상금만 862만 달러(약 91억5000만 원). 단신(短身)이라는 열세를 이겨내려고 무리하게 몸을 쓰다 보니 발목과 무릎 등 부상이 끊이지 않았다. 수술대에도 여러 차례 올랐지만 통증은 심했다. 절뚝거리며 18홀을 돌던 때도 있었다.

“키가 10cm만 더 컸다면 선수를 더 할 수 있었을 텐데, 10승도 채웠을 텐데. 대회 때마다 길어지는 코스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 때문에 오버스윙을 하다 부상으로 연결됐다.” 김미현은 아직도 LPGA 출전 자격을 갖고 있다. 컴백 제의도 받았지만 손사래를 쳤다고 한다. “요즘엔 오히려 키가 작아 주목을 받았고 과분한 관심도 받았지 않았나 싶다. 작은 키는 불운이 아니라 축복이었다.”

○ 라이벌에서 동반자가 된 세리

김미현은 중3 때 만난 1년 후배 박세리와 팽팽한 대결 구도를 그렸다. 국내 무대를 양분하던 이들은 1998년 박세리가 LPGA에 진출한 뒤 이듬해 김미현이 가세했다. 당초 김미현은 일본에서 뛰려다 박세리에게 자극받아 선회했다. 둘 다 LPGA 신인왕 출신. 박세리가 탄탄한 지원 속에 승승장구한 반면 김미현은 변변한 스폰서도 없이 중고 밴으로 상징되는 고단한 생활로 대조를 이뤘다. 앞서 나간 박세리와 동시대를 살았기에 2인자의 설움도 받았다. 그래서인지 팬들은 역경을 헤쳐 나가는 김미현에게 더 많은 박수를 보낸 적도 있다. “LPGA 초창기에 세리와 서먹한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이젠 친구처럼 지낸다. 경쟁자가 있어야 발전한다. 내가 해준 닭볶음탕과 곰탕을 먹고 세리가 우승한 적도 있지 않은가. 아직도 현장을 지키는 세리가 오랫동안 큰언니로 뛰어주길 바란다.”

○ 아버지 그리고 아들

김미현에게 아버지 김정길 씨(67)는 그림자 같은 존재. 딸에게 처음 골프채를 쥐여준 아버지의 신발 사업이 잘될 때는 기사 딸린 차를 타고 다니며 운동을 했을 정도였지만 고교 2학년 때 아버지의 사업 부도로 집안이 풍비박산 나면서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기도 했다. 김미현은 당시를 회상하며 “한창 골프가 잘될 때였는데 아빠에게 ‘이제 골프 못 치게 된 것이냐’며 울먹였더니 아빠도 따라 우셨다”고 했다.

다행히 친척의 도움으로 계속 운동을 할 수 있었던 김미현이 LPGA에서 뛸 때 아버지는 매니저, 코치, 운전사 등 1인 다역을 자처했다. 경비를 아끼려고 19달러짜리 싸구려 모텔을 전전하거나 내비게이션도 없던 시절 길도 많이 헤맸지만 이젠 모두 추억이 되었다. 그와 함께 자리를 했던 아버지 김 씨는 “13년 동안 미국 전역을 누볐어도 골프장만 다녔다. 돈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딸 운동에 방해될까 관광 한 번 해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딸은 “아버지의 헌신과 희생이 오늘의 나를 있게 했다”며 고마워했다.

김미현은 2008년 결혼 후 이듬해 아들 예성을 얻었다. “예성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은퇴를 앞당겼다”는 그는 집에서는 여느 워킹 맘과 다를 게 없다. 가족들 아침 식사 챙겨주고 아들을 유치원에 보낸 뒤 출근한다. 아들은 결혼 생활을 지탱하는 가장 큰 힘이다. “아들이 커서 남들에게 사랑을 많이 주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나중에 골프를 시킬 생각인데 가르치는 것은 남에게 맡길 거다. 내가 가르치면 모자 사이가 틀어질까봐, 하하하.” 환하게 웃는 그의 모습에서 우리 주변에서 평범하게 만날 수 있는 ‘아들 바보’ 엄마의 얼굴이 겹쳤다.

P.S. 김미현이 잊지 못하는 노래가 있다. 가수 박강성의 ‘내일을 기다려’다. LPGA투어 시절 아버지가 태우고 다니던 차 안에서 수도 없이 들었다고 한다. 2000km 거리를 26시간 걸려 이동할 때에도 계속 그 노래만 틀었던 적이 있었다니 오죽 많이 들었을까. “남의 발자국을 따라가기보다는 스스로 길을 만들어 온 것 같다. 고단해도 희망을 찾는 과정이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땅콩’은 여전히 뭔가를 기다리며 준비하고 있었다.

김종석 기자 kjs012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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