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박형준]일본 보수 지식인과의 대화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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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준 도쿄 특파원
박형준 도쿄 특파원
갑자기 한파가 밀어닥친 10일 저녁, 도쿄(東京) 시내에서 일본 지식인 2명과 저녁식사를 함께했다. 총리까지 지낸 거물 정치인의 수석비서관 A 씨,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부의 안보관련 전문가 간담회에 참여하는 B 씨. 둘 다 보수 인물임이 분명했다. 대화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일식집의 특징은 따뜻한 음식이 별로 없다는 것. 찌개 같은 국물 요리는 대체로 끝 무렵에 나온다. 그러다 보니 추위를 녹이려고 술잔만 빠르게 비웠다. 주고받는 술잔이 늘어나자 경계심도 곧 풀어졌다.

B 씨에게 “미국은 한일 관계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물어봤다. 그는 “미국은 초창기 아베 총리의 역사인식에 부정적이었고 한국에 동조했다. 하지만 작년 9, 10월경 분위기가 바뀌었다. 일본은 대화하려는 자세를 보이는데 한국이 너무 심하다고 여겼다”고 대답했다. 이어 “그런데 작년 12월 아베 총리가 야스쿠니(靖國)신사를 참배하면서 또 분위기가 바뀌었다”고 덧붙였다. 역시 일본의 역사인식이 문제라는 것이다.

A 씨도 맞장구를 쳤다. “국가지도자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영령들에게 예의를 표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지도자는 ‘외교’도 고려해야 한다. 신사 참배를 당연히 여겼던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총리도 한국과 중국이 반발하자 더는 그러지 않았다.”

이 같은 위기감으로 인해 최근 일본은 ‘아베 총리 구하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아베 총리의 친동생인 기시 노부오(岸信夫) 외무성 부대신이 미국으로 건너가 야스쿠니 참배에 대해 해명할 예정이다. 참배 경력이 있는 각료인 시모무라 하쿠분(下村博文) 문부과학상 등도 미국, 동남아시아 등지를 방문하며 상대국의 이해를 구할 계획이다.

그들의 논리는 “아베 총리가 야스쿠니신사를 찾은 것은 ‘부전(不戰)’의 맹세를 위한 것이다. 일본이 군국주의로 나아가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A 씨와 B 씨 모두 부정적이었다.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왜 제2차 세계대전 A급 전범이 합사된 곳에서 하느냐’는 것이다.

아베 총리는 한일 정상회담을 수차례 공개적으로 요청했다. 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한 중요한 인접국이라고 한국을 치켜세운다. “대화의 문은 열려 있다”고 항상 말한다. 하지만 그의 언행에선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2006년 10월 나카소네 전 총리는 동아일보와 인터뷰에서 ‘바람직한 한일관계’에 대한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외교의 중심점은 양국 수뇌가 정말로 우정을 느끼고 굳게 악수하는 것이다. 서로 우정을 느낄 수 있도록 상대의 입장도 존중하고 이쪽 입장도 존중받는 방식이 돼야 한다.”

아베 총리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우정을 느끼게 하고 존중받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줬는지는 의문이다. “문제가 있을수록 양국 정상이 직접 만나 풀어야 한다”고 말하고는 있지만 문제를 저질러 놓은 측에서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약 2시간의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왔다. A 씨와는 두 번째, B 씨와는 첫 만남이었다. 일본의 헌법 개정, 과거 일본의 행위 등에서 서로 의견이 엇갈리기도 해 분위기가 어색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서로 상대 측 입장을 배려했기에 ‘그렇게 볼 수도 있구나’라는 느낌이 들었다. 헤어지며 점잖은 악수를 하는 게 아니라 덥석 손을 맞잡으며 “꼭 다시 만나자”고 인사를 했다. 일본 우익 정치인들의 폭주를 보면 실망하기 일쑤다. 그렇지만 일반인에게서는 희망의 싹을 조금씩 본다.

박형준 도쿄 특파원 love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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