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이 한줄]멋쟁이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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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9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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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노 속에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나에게 분노는 새로운 형태의 열정이다.”

알렉산더 매퀸(1969∼2010)

백화점에 서 있었다. 오랜만이었다. 백화점의 쇼퍼홀릭이란 활어회집 수족관에 누워있는 광어만큼이나 흔한 존재다. 하지만 언젠가 백화점 쇼윈도보다 ‘70% 세일’을 알리는 인터넷 쇼핑몰의 팝업창이 더 매혹적으로 보이기 시작하면서, 판매원과의 갑작스러운 친교, 홀수와 짝수 층으로 나뉜 엘리베이터와 VIP주차장, 숨겨놓은 가격표 등 모든 것이 부조리하게 느껴졌었다. 물론 인터넷 쇼핑몰이 처음 등장했을 때 나를 포함한 쇼퍼홀릭들은 팔짱을 끼고 이렇게 말하긴 했다.

“마우스로 꽁치통조림이나 사야지, 옷을 산다는 게 말이 돼? 원피스의 목선과 내 목을 어떻게 맞춰볼 건데? 루부탱의 하이힐이 아킬레스건을 얼마나 아름답게 만드는지 봐야 그 어마어마한 가격이 설득이 되는 것 아니야? 손목에 주렁주렁 쇼핑백을 달고 다니는 재미는 또 어쩔 건데? 인터넷으로 패션을 사고파는 세상은 산성비가 주룩주룩 오는 곳과 같아. 세기말인 거지!”

그 실존적(?) 쇼퍼홀릭들이 요즘은 택배로 받은, 수공예의 기품이 느껴지는 가방을 쓰다듬으며 “인터넷으로 주문서 쓰고 3일이면 전 세계로 배달을 해주더라니까”라고 속삭인다. 불안한 눈빛은 단지 ‘가방이 꽁치통조림으로 변할까봐…’일 거다.

낯선 쇼윈도를 바라보며 서 있으니, 내가 백화점에서 찾고 있는 게 유행이라는 걸 알겠다. 그런데 요즘은 유행이 스르륵, 행방불명됐다. 다이아몬드 무늬 재킷이 눈에 띄고, 검은 레이스와 버건디색 코트들이 나왔지만 정당한 트렌드는 없다. 너구리(털 제품)도 있지만, 그의 삶도 재미없었나 보다. 숭숭한 털이 까칠하다.

지나간 패션지들을 꺼내 본다. 부푼 어깨의 재킷들, 겉옷이 된 코르셋, 엉덩이골을 드러낸 바지, 깃털과 해골의 도상이 이어진다. 당시엔 저항할 수 없는 유행이 있었고, 기꺼이 복종하는 속물들이 있었다.

이 모든 유행을 만들어낸 건 영국 디자이너 알렉산더 매퀸이었다. 2010년 마흔 나이에 자살할 때까지의 10년 남짓, 그는 여성과 패션에 대한 기존의 질서와 관행을 파괴하면서, 놀랍게도 매 시즌 새로운 유행을 창조했다.

그는 증조부의 고향 스코틀랜드를 탄압한 잉글랜드에 대해 갖게 된 적개심, 노동자계층 출신이면서 귀족적 오트 쿠튀르((haute couture·최고급 맞춤 의상)를 만드는 모순에서 오는 갈등, 예술적 재능을 유행으로 팔아먹는 패션산업에 대한 분노와 성공에 대한 열망 사이의 자기 분열 등을 기괴하고 아름다운 패션쇼로 표현했다. 그의 모델들은 끝내 정신병자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괴물처럼 잘나가는 레이디 가가 같은 유명 여성들이 매퀸을 지지했다. 열정이 넘치던 시대, 여성들은 바지는 내려 입고, 해골 스카프를 둘렀다.

유행은, 프랑스 혁명만큼은 아니지만, 세상을 바꾸려는 욕망이다. 한 복식학자는 유행이 ‘당대 사람들의 옷에서 무엇인가 의미를 읽게 해주는 시각적 규칙의 코드를 수정하는 것’이라고 점잖게 표현했다. 그러나 메리퀀트의 ‘미니’스커트(1962년)나 이브생로랑의 여성용 바지정장 ‘르 스모킹’(1966년)처럼 유행은 늘 세상과 맞선 이들의 분노로 불이 붙었다.

1950년대 우리나라 ‘명동아가씨’에게도 유행이란 “내가 이뤄봤으니까 나중에도 뭐든지 내가 생각하고 노력하면 된다 하는 자신감”이었다. 멋을 내면 “날아가는 새도 잡을 수 있을 것”이 라고 했다(김미선· ‘명동아가씨’ 중).

인터넷 쇼핑몰만큼, 오랫동안 유행을 혐오(하려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매퀸은 죽고, 시비 걸 데도, 발로 찰 것도 사라져 버리니, ‘이대 나온 여자’룩이었던 스타킹을 신고 미도파백화점을 돌아다녔던 명동아가씨가 부럽다. 쇼퍼홀릭에게 유행은 새로운 형태의 열정이다.

消波忽溺 쇼퍼홀릭에게 애정과 연민을 느끼며 글을 씁니다.

holden@donga.com
#멋쟁이#쇼퍼홀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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