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향의 달콤쌉싸름한 철학]허정(虛靜)의 시간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7월 6일 19시 30분


코멘트
살아보면 시간만큼 상대적인 것도 없습니다. 학창시절은 마디고 더뎠는데, 그 이후론 추락하는 물체처럼 가속도가 붙습니다. 존재는 흔적을 남긴다는데, 물거품처럼 사라진 지난날들은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 걸까요? 쏜살처럼 꿈결처럼 사라져버린 길고긴 시간의 말미에서 묻게 되는 물음은 조용필의 '어제 오늘 그리고'의 노랫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찾은 것은 무엇인가, 잃은 것은 무엇인가, 남은 것은 무엇인가.

처자식을 위해 뼈 빠지게 일했는데, 가족들에게까지 자신은 돈 버는 기계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얘기를 하는 남자들이 많습니다. 삶이 정직한 거라면서요? 돈 버는 기계로만 살았으니 돈 버는 기계로밖에 대접을 못 받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성실하게 노력하며 돈을 버는 일은 생존을 위해선 중요한 일이지만, 생존 너머의 일엔 관심도 없고 지향성도 없는 삶은 그저 불안 불안합니다. 일하는 말인 양 자신을 조직의 고삐에 묶고 바쁘고 고되게 채찍질만 해온 인생이라면 밤마다 스스로에게 그 고삐를 풀어주는 고요한 시간을 만들어주는 게 어떨까요? 노자를 빌리면 그것은 허정(虛靜)의 시간입니다.

매주 토요일 오후 광화문 역사박물관에서는 우리나라 석학들의 인문학 강의가 있습니다. 이번 주엔 이화여대 철학과 정대현 명예교수의 다원주의 실재론 강의가 있고, 지난주엔 연세대학교 이강수 명예교수의 동양철학 강의가 있었습니다. 자신을 아는 자가 진정 지혜로운 자라는 이강수교수의 노자 강의에 나는 매료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알아가는 방법으로, 비워내고 고요히 하는 노자의 허정(虛靜)의 시간을 권했습니다. 매일 밤 5분만이라도 숨을 깊게 들이 마시고, 멈추고, 천천히 내쉬는 호흡법으로 마음을 챙기는 일에 길들여지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일로 시간을 허비하면서 "바쁘다"는 말을 달고 살게 되지는 않을 거랍니다.

바쁘다는 것이 능력의 척도인 줄 아는 현대인들은 늘 바쁘지요? 바빠서 바쁘기도 하고, 마음이 조급해 일에 끌려 다니느라 바쁘기도 합니다. 한순간도 조용하게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는 도시인들은 늘 바쁘고, 늘 불안하고, 늘 누군가를 미워하고, 늘 화가 나 있고, 늘 전투 자세입니다. 그런데 그것이야말로 되는대로 사는 것이 아닐까요? 욕심과 불안과 분노와 미움과 아집이 나를 지배하도록 그대로 두는 것입니다.

그대로 둘 경우 어떻게 될까요? 더 산란해지고, 더 정신없어지고, 비판이란 이름으로 남의 욕만 달고 다니다 누군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분노가 폭발하는 화약고가 됩니다. 그래서 비워내고 고요히 하는 시간이 절실합니다.

그런데 비운다고 비워질까요, 고요히 한다고 고요해질까요? 가만히만 있어도 마음은 원하는 것으로 숨이 차고 온갖 잡생각으로 들끓는데! 그래서 단전호흡을 하거나 자연호흡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숨을 관찰하면서 들고 나는 생각들을, 엄마가 놀고 있는 아이를 지켜보듯이, 지켜보는 거지요. 명상은 무슨 좋은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몸에서, 내 마음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 세밀하게 관찰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열심히 일한 '나'에게 허정의 시간을 선물해 보시지요? 매일 10분만이라도 온전히 '나'만의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서, '나'를 지지해준 몸과 마음과 호흡을 관찰해 보는 겁니다. 고요히 하기엔 주변 세상이 너무 시끄러운가요? 파우스트는 온갖 유령들을 지나치면서도 차분히 걸었습니다. 시끄러운 중에 고요해질 수 있는 힘이 생길 때까지 마음에 힘을 붙여야 합니다. 마음이 힘입니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