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박현진]전기 없이 미국에서 살아보니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1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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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진 뉴욕 특파원
박현진 뉴욕 특파원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가장 오랜 시간을 전기 없이 지냈다. 그것도 세계 최대 강국이라는 미국에서 말이다. 10월의 눈 폭풍이 불어닥친 지난달 29일 뉴욕 뉴저지 코네티컷 펜실베이니아 매사추세츠 주 등 미 동북부 300여만 가구의 전기가 끊겼다. 뉴저지 주에 살고 있는 기자의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전될 때만 해도 길어봤자 하루 이틀이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집에 전기가 들어온 것은 5일이 지난 이달 3일 밤이었다. 코네티컷 주의 일부 도시는 11일 동안을 전기 없이 살아야 했다. 불편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한 지인은 전기로 작동되는 화장실을 사용할 수 없어 며칠간 변기에 생수를 부어 물을 내리면서 지냈다. 9월 중순 한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5시간 동안의 정전사태는 비할 바가 못 된다.

이곳의 주재원들 입에서는 ‘여기가 미국이 맞나’ 하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미 현지 주민들은 이런 하소연에 처음엔 미소까지 지으며 “워낙 광활한 나라라서 자연 재해가 잦다”고 별일 아니라는 듯 넘겼다. 그러나 예상외로 복구가 지연되고 생활의 불편이 가중되자 이들은 “예전에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라며 얼굴이 점차 굳어갔다.

미국이 많은 나라의 벤치마킹 대상이라는 점은 지금도 유효하다. 하지만 요즘 들어 ‘과연 그러한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미국인이 점차 늘고 있다. 9월 초 미국에서 발간돼 베스트셀러에 오른 ‘한때 우리가 그랬었지(That used to be us)’를 쓴 토머스 프리드먼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는 이 책에서 미국이 뒤처지고 있는 현실을 날카롭게 꼬집었다. 그는 지난해 9월 중국 톈진(天津)을 방문해 컨벤션센터를 32주 만에 지었다는 말을 듣고 놀랐다. 정작 그가 더욱 경악한 것은 미국으로 돌아온 뒤였다. 자신의 동네 지하철역의 작은 에스컬레이터 2개를 고치는 데 6개월이 걸렸다는 얘기를 듣고 나서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미 동북부의 정전이 지속되던 2일 워싱턴과 버지니아 주를 잇는 포토맥 강 다리 중 하나인 키브리지 아래에 섰다. 미 의회가 서둘러 ‘일자리 창출법안’을 통과시켜 다리를 공사할 수 있게 해달라는 정치적 제스처였다. 이 자리에서 오바마는 “이런 곳이 곳곳에 있다. 중국 등은 이런 시설들에 끊임없이 투자하지만 우리는 아니다”고 토로했다. 이뿐만 아니다. 올 들어 빈부격차 확대, 실업률 증가, 학자금 대출 증가율 등의 어두운 현실을 보여주는 사회통계 수치에는 매번 ‘사상 최대’와 ‘사상 최고’의 수식어가 붙는다. 8주째 미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월가 시위는 예전 같지 않은 미국 사회를 보여주는 또 다른 거울이다.

내년 11월 미 대선을 전후해 미 정부와 정치권이 스스로 이런 문제점을 하나씩 잘 풀어나갈 것이라고 믿는다. 문제는 우리에게 던져진 공이다. 제프리 색스 컬럼비아대 교수는 최근 파이낸셜타임스에 실린 기고문에서 “이달 초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약해진 미국의 위상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유로존의 위기 해결사로 중국 등 신흥국의 힘을 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묘하게 흘러가는 국제 정세의 변화에 한국은 장기적인 안목을 가져야 할 시점이다. 대영제국이 대서양 건너 부상하는 미국을 보며 ‘오 마이 갓(이걸 어쩌지)’이라고 외친 것이 불과 100여 년 전이다.

박현진 뉴욕 특파원 witness@donga.com

▲동영상=미 북동부 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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