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혁 전문기자의 세상이야기]해인사 장경판전 15년 지킴이 안진만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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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0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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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판전 살창에 매달리는 사람들 말리다보면 눈물이 나요”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해인사 장경판전 지킴이로 15년째 근무 중인 안진만 씨. 그의 법명은 생도(生道). 최고 도량을 잘 지키라는 뜻으로 받은 이름이라고 한다.합천=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해인사 장경판전 지킴이로 15년째 근무 중인 안진만 씨. 그의 법명은 생도(生道). 최고 도량을 잘 지키라는 뜻으로 받은 이름이라고 한다.
합천=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나는 결국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왜 그렇게 떠드는 것이냐. 제발 조용히 하라”고.

지난달 28일 오전, 팔만대장경이 보존돼 있는 경남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藏經板殿). 중학생쯤 됐을까, 족히 100명은 됨직한 어린 학생들이 마치 유원지에라도 온 듯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여기저기를 헤집고 다녔다.

화가 나 인솔교사를 찾아보려 했지만 누가 교사고 누가 일반관람객인지 구별하기도 쉽지 않았다. 순간 장경판전 안내판 앞에 서서 팔만대장경과 장경판전의 역사적 의미를 경청하고 있는 일본인 관광객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두 장면 사이에서 나는 낙담하고 말았다.

하필이면 그때 우연히 목격한 단편적인 장면 아니냐고? 그랬으면 좋겠다.

하지만 합천군에서 파견된 장경판전 지킴이 윤한상 씨가 올해 5월 월간 ‘해인지(海印誌)’에 기고한 글을 보면 그렇지 않다. 그는 “질서 유지에 가장 어려운 분야가 바로 학생들의 관람”이라고 토로했다.

더 기가 막힌 장면도 있었다고 한다. 4월 말경. 노신사 여러 명이 호탕하게 떠들며 장경판전에 들어섰다. 그중 한 사람이 윤 씨에게 “우리 일행은 전직 장관만 4명이고 모두가 대학 총장과 교수들”이라고 귀띔해줬다. 과연 대장경 인경본(印經本)의 반야심경을 해석할 정도로 식자(識者)들이었다.

“그런데 조금 뒤에 보니까 모두 법보전(法寶殿) 오른쪽 주련(柱聯·기둥에 연이어 걸어 놓은 글판) 밑에 모여서 초서체로 돼 있는 ‘處(처)’자를 놓고 무슨 글자냐고 서로 얘기하던 중 한 분이 주련의 그 글자 위에 손가락을 대고 그대로 따라 쓰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라 급히 뛰어가면서 손을 대면 안 된다고 소리를 질렀으나 이미 손가락이 지나간 글자는 부스러기가 돼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해인사는 신라 애장왕 3년, 서기 802년에 창건된 이래 모두 일곱 차례의 큰 화재가 있었다. 대웅전인 대적광전도 화재로 전소된 것을 1818년에 다시 건축한 것이다. 대적광전과 장경판전의 거리는 직선으로 불과 20여 m. 대적광전이 전소될 정도의 화재라면 불길이 엄청났을 텐데도 장경판전은 온전했다. 그런 문화유산을 다름 아닌 우리 스스로 갉아먹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장경판전은 1995년에, 팔만대장경은 2007년에 각각 세계문화유산과 기록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됐다. 현재 장경판전을 지키는 직원은 모두 4명. 그나마 팔만대장경이 세계기록유산에 오르고 2008년 숭례문 화재 사건으로 문화재 관리에 대한 국민적 경각심이 높아진 다음의 일이다.

그전에는 해인사 소속의 안진만 씨(61) 혼자 장경판전을 지켰다. 벌써 15년째다. 장경판전 앞 1m² 남짓한 경비실에서 안 씨를 만났다. 그런데 인터뷰 내내 기자는 그의 눈을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의 시선은 시종 관람객들의 동선을 좇고 있었다.

―관람객들의 질서 수준에 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발로 차지 마라, 침 뱉지 마라, 만지지 마라, 촬영하지 말라고 아무리 얘기를 해도 안 듣는다. 특히 어린 학생들이 하루 종일 장경판전 살창에 매달리고, 흔들고, 차고 그러니까 가슴이 엄청 아프다.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안식구처럼 관리하고 있는데. 그러니까 힘 드는 것도 힘 드는 것이지만 눈물이 날 때도 많다. 목도 쉬고…. 그래도 이젠 정부에서 (관리 인력을) 지원해주니까 좀 좋아졌다.”

―얼핏 봐도 장경판전이나 팔만대장경에 진지한 관심을 보이는 관람객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연세가 많고 문화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그래도 진지하게 보는 편이다. 하지만 젊은 사람들은 벌로 본다(‘벌로 본다’는 경상도 사투리로 ‘주의 깊게 보지 않는다’는 뜻). 90%는 뜻을 모르고 본다. 안내판도 있고 설명서도 있는데 안 본다.”

―관리는 어떻게 하고 있나.

“관람객 관리가 제일 중요하다. 그리고 장경판전 주변을 매일 청소하고, 한 달에 두세 번은 판전 내부 바닥을 깨끗이 한다. 가을이 되면 팔만대장경이 보관돼 있는 장경판전 살창 사이로 낙엽이 많이 들어온다. 관람객과 애들이 던져 넣는 것들도 많고….”

목재로 된 살창 틈새는 어른 손이 들어갈 정도. 해인사 총무국장인 심우(尋牛) 스님은 “해인사 창고에 가장 많이 쌓여 있는 물건이 성경책”이라고 했다. 일부러 성경책을 던져 넣는 관람객이 많다는 뜻이다.

―가장 신경을 쓰는 것은 역시 화재인가.

“화재 방지가 제일 우선이다. 사람을 잘 봐야 한다. 관람객 중에는 정신이상자도 많고, 별 희한한 사람이 많다. 관광철이 되면 오후에 술에 취해서 오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이 오면 관람을 다 마치고 나갈 때까지 따라 다닌다. 특히 사람이 많을 때보다 관람객이 적은 1, 2월에 하나둘씩 찾아오는 사람들이 더 신경이 쓰인다. 아무 탈이 없어도 끝까지 따라붙어야 한다.”

―외국인도 많이 올 텐데 그들의 관람 태도는 어떤가.

“외국 사람들은 절대 어긋난 행동을 안 한다. 안내문도 열심히 읽고…. 외국인 관람객의 60%는 일본 사람들인데 더 정확하다. 내가 정작 신경 쓰는 건 바로 우리 국민들이다. 왜 우리 국민들은 저런 본을 안 보는지…. 묵고(먹고) 노는 데, 말하는 데, 싸움하는 데만 1등을 할 게 아니라 문화유산에 대한 자부심에서도 1등이 돼야 한다. 아쉬움이 너무 많다.”

―혼자 할 때는 어떻게 했나.

“1997년에 (해인사에) 입사해 혼자서 5년 8개월을 근무했다. 그때는 정말 힘들었다. 풀도 무성하고 엉망이었다. 또 여긴 겨울에 눈이 많이 온다. 2001년엔 두 달간이나 눈이 내렸다. 버스가 올라올 수 없으니까 집에서 1시간 반이나 눈을 헤치고 걸어와야 한다. 그 눈을 밟고 올라오면 온몸이 땀투성이가 된다. 그리고 하루 종일 눈을 치워야 했다. 몇 번이고 보따리를 싸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것도 내 인연이다’라는 생각으로 오늘까지 왔다.”

―해인사에 ‘입사’하기 전에는 뭘 했나.

“합천은 도자기로 유명한 곳이다. 도자기 회사에 다녔다. 그러다 허리디스크 수술을 받고 난 다음 해인사로 들어왔다. 아직도 신(힘든) 일을 하면 허리가 뻐근하지만 원력(願力·부처님께 빌어 원하는 바를 이루려는 마음의 힘)으로 버티고 있다.”

―원래 불교 신자였나? 불심이 깊은 것 같다.

“그냥 (불자들이)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는 건 갖고 있다. 아침에 오면 법보전에서 삼배(三拜)를 하고, 일을 마치고 돌아갈 때 또 삼배를 한다. 그렇게 지내다 보면 나 자신도 모르게 진리가 나온다. 무엇보다 욕심을 버려야 한다. 마음을 비우면 가정이 편안해진다. 처음 왔을 때 누군가가 ‘힘들고 눈물 날 때도 있겠지만 가정이 평안하면 돈 버는 것 아니냐’고 하던데 그 말이 맞다. 아침에 삼배, 저녁에 삼배를 하고 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게다가 여기는 고려시대 어른들이 팔만대장경을 전부 손으로 파서 나라 지키겠다고 모셔놓은 곳 아니냐. 얼마나 좋은 자리겠나. 기분이 안 좋을 때도 있고, 사람들한테 충격을 받을 때도 있지만 여기만 오면 기분이 좋아진다. 설사 집에 양식이 없다 해도 마음만은 환해진다.”

―얘기를 듣다 보니 보수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금전 가지고는 별로 생각 안 해봤다. 전혀 해 본 적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이것도 내 인연이고 복이다. ‘처사님, 대장경을 지켜줘서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하는 사람도 많다. 마음을 비우고 세월이 흐르면 내 가정도 평안해지고 복도 올 것 아닌가. 이 자리는 전생에 복을 짓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곳이라며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다.”

―지금이야 자식들이 다 장성했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15년 전, 10년 전엔 어려웠을 것 아닌가.

“(겸연쩍게 웃으면서) 안식구가 농공단지 직물공장 기술자로 있어 나보다 두 배는 더 받는다. 물론 걱정이 없지는 않다. 내가 힘이 달리면 그만둬야 하지 않겠나? 몇 년은 더 하겠지만 후임자가 잘 정해져야 할 텐데 젊은 사람들은 (지금 보수로는) 생활하기가 어려울 게 분명해서….”

안진만 씨에게 장경판전(국보 52호)과 팔만대장경(국보 32호)은 국보 이상의 그 무엇이고, 세계문화유산 이상의 그 무엇인 듯했다. 그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온 국민이 나서 팔만대장경을 새기고, 바람 습기 온도를 맞춰 이 장경판전 터를 닦은 조상들의 마음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플 때가 많다”고 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 보존국장인 성안 스님은 어느 인터뷰에서 “팔만대장경의 법문을 한 글자로 응축하면 결국 마음 심(心)이 된다”고 했다.

해인사는 지금 고려대장경 발원 1000년을 기념하는 ‘대장경천년세계문화축전’ 중이다. 9월 23일부터 11월 6일까지 45일간 대장경 실물 중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판과 ‘화엄경 변상도’ 두 점이 일반에 공개된다.

그냥 와서 구경하고 돌아가는 기회가 아니라 자기 마음을 되돌아보는 축전이 됐으면 좋겠다.

장경판전의 수다라장과 법보전엔 16개의 풍경이 매달려 있다. 풍경소리는 물고기가 물속에서 눈을 뜨고 잠을 자듯이 열심히 수행하라는 뜻이다. 팔만대장경의 마음이 그 풍경에 실려 이 땅 모든 사람에게 맑은 소리를 들려줬으면 좋겠다.

속세에 영원한 것이 어디 있으랴. 장경판전과 팔만대장경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세월의 풍화보다 우리의 몰이해와 몰지각이 앞서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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