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rrative Report]돌아온 입양아 박혜진 씨의 희망찾기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7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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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 미국에서는 킬리키코파 그레이울프라고 불렸다. 한국 이름은 박혜진(25)이다. 두 개의 이름을 가진 남자. 그는 생후 4개월 때 인디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에게 입양됐다. 한국에서 입양된 한 살 위의 누나, 열세 살 어린 남동생과 함께 자랐다.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서로 볼을 비비며 사랑했다. 진짜 가족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을 진짜 가족으로 봐 주지 않았다. 기억이 가물가물할 만큼 어릴 때였다. 가족이 오붓하게 캔자스의 한 태국 레스토랑에 외식을 하러 갔다. 식당에 들어서자 가게 주인은 “손님을 받지 않겠다. 나가달라”고 말했다. “문을 열었는데 왜 나가라는 거죠?” “아시아의 아이를 훔쳐온 미국인들에게 음식을 줄 수는 없어요.”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침묵이 흘렀다. 엄마가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 농담을 건넸지만 혜진은 웃지 않았다. 자신에 대한 편견은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남들에게 한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까지 받아들일 순 없었다. 사회의 따가운 시선이 슬펐다. 》
○ 인디언 이름을 가진 한국 아이

1986년 겨울. 태어난 지 4개월 된 갓난아이가 이불에 싸인 채로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새아빠와 새엄마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14시간이 넘는 비행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울지 않더라는 이야기는 나중에 전해 들었다. 경남 마산시(현 창원시)에서 태어난 혜진은 미국 하와이로 건너가 킬리키코파 그래이울프가 됐다.

“킬리키코파!”

인디언 이름으로 불렸다. 외모는 한국인인데…. 낯설었다. 그래도 그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까만 머리와 까만 눈동자는 미국 인디언 착타족인 아버지를 닮았기 때문이란 얘기를 자주 들었다. 한국에서 입양된 형제가 있어 서로 의지하며 지냈다. 거실에 걸린 가족사진을 보면서 ‘나 혼자만 다르지는 않구나’라고 생각하며 외로움을 삭일 수도 있었다.

그는 미국인으로 자랐다. 매일 먹는 음식부터 삶을 꾸리는 가치관까지 미국인이었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은 그를 미국인으로 대하지 않았다. “한국어 해봐.” “태권도 해봐.” ‘생물학적 한국인’이란 사실이 족쇄처럼 그를 따라다녔다. 자라면서 한국 문화를 접할 기회는 전혀 없었지만 한국인답게 행동하기를 암묵적으로 강요당했다.

“도대체 내게 왜?”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 미국에서 입양아로 산다는 것

그의 미국인 아버지는 공군이다. 직업 특성상 근무지가 자주 바뀌어 미국 내에서도 여러 주를 돌아다녔다. 지역마다 입양아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랐다.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사는 캘리포니아와 하와이에서는 아시아인라고 해서 색안경을 쓰고 보는 시선이 적었다. 하지만 아이오와나 캔자스 주같이 주민 대부분이 백인인 곳은 달랐다.

혜진이 다녔던 캔자스의 초등학교는 전교생 600여 명 가운데 아시아인이 두 명에 불과했다. “킬리키코파, 네 눈은 왜 작은 거야?” “머리는 또 왜 새카맣지?” 빙 둘러서서 놀리는 아이들. 활달한 성격의 그는 대수롭지 않게 웃어 넘겼다. 하지만 거울에 비친 그의 모습은 친구들의 비아냥거림과 다르지 않았다. 혼란스러웠다.

“넌 부모가 버렸잖아.”

아무리 놀려도 참았다. 그러나 친구들이 ‘버려진 아이’라고 불렀을 때 진실을 외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학교에서 눈이 작은 아이는 셋이었지만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는 자신이 유일했다. 그랬다. 그는 버려진, 남들과 다른 아이였다.

○ 다른 남자의 아이였다

‘나는 누구일까.’ 늘 목말랐다.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갈증을 해결할 수 없었다. 부모로부터 한 번, 나라로부터 한 번. 그는 두 번이나 뿌리가 강제로 뽑히는 경험을 했다. 만 스물다섯이 되는 2011년을 앞두고 그는 한국을 찾기로 결심했다.

해외입양아들은 보통 만 18세가 넘으면 한국을 방문해 자신의 뿌리를 찾아본다. 국내 입양기관들은 법적으로 만 18세가 되기 전까지는 입양아가 관련 정보 파일을 열람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혜진은 한국에 들어와서도 한참이 지난 뒤에야 입양 정보 파일을 열람했다.

“서두르고 싶지 않았어요.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던 것 같아요.”

입양 파일 안에는 가여운 갓난아기가 보였다. 남편과 사별한 뒤 다섯 명의 딸을 홀로 키우던 엄마는 뜻하지 않게 임신을 하게 됐다. 엄마는 딸들에게도 창피했고, 마을에 나쁜 소문이 날까 겁이 났다. 인근 시골 마을에 숨어 남몰래 아이를 낳았다. 태어난 지 하루도 안 된 핏덩이는 엄마 품을 떠나 홀트재단으로 인도됐다. 비행기를 탈 수 있는 최소한의 나이인 생후 4개월이 되자 그 아이는 미국 가정에 입양됐다.

오랜 망설임 끝에 알게 된 출생의 비밀. 담담했다. 혜진은 엄마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면 어떤 느낌일까 궁금했다. 그러나 엄마와 직접 통화하지는 못했다. 입양기관에서는 입양파일을 공개하기 전에 친부모와 연락을 취한다. 자녀를 만날 의향이 있는지를 먼저 확인하기 위해서다. 엄마는 만남을 거부했고 그 대신 주소만 알려줬다. 다섯 명의 누나 몰래 편지만 두세 번 주고받았다. 엄마는 ‘혜진아, 잘 살고 있니? 미안해’라고 꾹꾹 눌러 적은 답장을 보내왔다.

“그래도 엄마가 밉지는 않았어요. 오죽하면 자식을 버렸을까 하는 생각에 그저 딱하다, 안됐다 싶은 마음이었어요.”

○ 한국에서도 나는 이방인

한류에 푹 빠지거나 한국을 싫어하거나…. 해외입양아들은 모국 ‘한국’에 대해 각기 다른 태도를 취한다. 혜진은 무관심한 쪽이었다. 그에게 한국은 이탈리아 프랑스처럼 미국 밖에 있는 여러 나라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그러나 해외입양아들의 공통점도 있다. 바로 한국에 대한 호기심이다. ‘내가 태어난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한국 사람들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할까.’ 한국이라는 단어에 귀가 쫑긋해지고 궁금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래서 다들 한 번쯤 한국을 방문한다.

한국에서도 해외입양은 평생 낙인으로 남는다. 5월 연세대에서 열린 한 축구대회에서 해외입양아들이 축구단을 꾸려 결승까지 진출했다. 방송사 취재팀이 그들을 찾았다. 그러나 취재팀은 축구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입양아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만 물었다.

그는 피식 웃음이 터졌다. 사람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슬픈 이야기를 끌어내려는 ‘노력’이 억지스러워 보였다. 미국에서는 ‘버려진 아이’라는 시선이, 한국에서는 ‘불쌍한 아이’라는 시선이 옥죄는 느낌이었다. 어느 쪽이나 불편하기는 매한가지다.

“한국인들은 입양됐다고 하면 곧바로 슬픈 눈을 하고 나를 바라봐요. 질문을 던진 것조차 몹시 미안해하며 어쩔 줄 몰라 하죠. 마치 내게 뭔가 잘못한 것처럼 대해요.”

‘동정’의 시선을 보내는 순간 그는 ‘남’이 돼 버렸다. 한국에서도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곱씹게 했다. 그가 어떤 지위에 있든, 어떤 것을 성취하든 그는 해외입양아일 뿐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안됐구나. 넌 우리와 다른 아이야’라고 말하고 있었어요.”

미국에서는 미국인이 되기를, 한국에서는 한국인이 되기를 강요당했다. ‘한국인인데 왜 영어를 쓰냐’고 타박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택시를 타려다 승차 거부를 당하기도 했다.

○ 나와 같은 아이 입양할 것

“버림받은 것은 불행이지만 새 가족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고 생각해요. 누가 뭐래도 입양은 내 인생에서 최고의 사건이었어요.”

혜진처럼 해외로 입양된 아이들은 지난해까지 23만8000명. 국내 입양의 3배가 넘는다. 매년 2000∼3000명의 해외입양아가 한국을 방문한다. 혜진은 행복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국내입양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해외입양은 부모로부터, 사회로부터 동시에 버림받는 거란다. 실제 많은 해외입양아가 한국을 방문한 후에 “존재가 두 번 부정당했다는 느낌 때문에 영혼이 불안해진다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혜진은 한국에 머문 7개월 동안 홀트재단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했다. 영어강사 쪽이 돈을 많이 벌 수 있었지만 입양아들을 돕는 일을 택했다. 입양을 기다리는 아이들이나 조손가정 한부모가정 아이들에게 무보수로 영어를 가르쳤다. 외로운 사람끼리는 서로 알아보는 법일까. 영어 이름을 발음하기도 부끄러워하던 아이들이 그를 졸졸 따라다녔다.

“힘든 아이들에게 내가 받은 것을 돌려줄 수 있다니 값진 경험이었어요.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공부도 시작하기로 했어요.”

혜진은 24일 한국생활을 정리하고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24년 전 그날과 다른 점은 가족이 아니라 꿈을 찾아 미국으로 향했다는 것이다. 가을학기부터 오리건대 로스쿨에 진학해 국제법을 공부할 계획이다. 특히 입양 관련법을 집중적으로 공부해 훗날 입양아들을 위해 일하려는 포부도 갖고 있다.

나중에 결혼하면 직접 입양도 할 계획이다. 자신이 직접 낳지 않은 아이를 키우면 어떤 느낌이 들지, 아버지의 마음은 어떨지 이해하고 싶어서다. 그때는 진짜 뿌리를 내린, 단란한 가정을 꾸릴 수 있을 것 같단다.

우경임 기자 woohaha@donga.com  
송지은 인턴기자 연세대 아동가족학과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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