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식 칼럼]한국사 교과서, 부실도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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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5월 17일 2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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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찬식 수석논설위원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원로 사학자 한영우 이화여대 석좌교수에게는 특강 요청이 끊이지 않는다. 주로 기성세대인 수강생들은 그의 강의를 들은 뒤 “우리에게 이런 훌륭한 역사가 있었는지 몰랐다”면서 “왜 학교에서 진작 가르쳐주지 않았느냐”며 아쉬움을 드러낸다고 한다.

역사 외면 자초하는 암기 과목화

그는 특강에서 조선시대의 기록문화를 자주 소개한다. 프랑스에 약탈당했다가 최근 귀환한 조선왕실의궤가 단골 소재다. 정조 때 편찬한 ‘화성성역의궤’는 1796년 수원에 화성을 건설한 뒤 공사 과정을 기록한 보고서다. 화성의 모든 시설물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고 공사비용을 어떻게 조달하고 지출했는지, 5000여 명의 기술자가 어느 날짜에 작업을 했는지 자세히 적혀 있다.

한 교수는 수강생들에게 의궤에 실린 그림을 영상으로 확대해 보여주고 해당 문헌을 해석해주기도 한다. 화성 신도시가 건설됐던 18세기에 미국 워싱턴 시와 러시아 페테르부르크 시가 같이 세워졌으나 미국과 러시아는 당시 이런 보고서를 만들어내지 못했다고 비교하기도 한다. 수강생들은 새로 알게 된 우리 기록문화의 우수성에 탄성을 자아낸다고 한다. 역사는 이처럼 전달하는 방법에 따라 얼마든지 흥미진진한 분야가 되기도 하고 따분한 학문이 되기도 한다.

새로 만들어진 고교 ‘한국사’ 교과서가 좌(左)편향 논란을 부르고 있다. 그러나 교과서 내용을 살펴보면 이념 논란 이전에 역사교과서로서 크게 부실하다는 생각을 먼저 갖게 된다. 현대사 분야의 경우 6종의 검정교과서는 60여 년의 우리 현대사를 80쪽에서 100쪽 정도의 분량으로 기술하고 있다. 광복 직후 좌우 대립, 대한민국 건국, 6·25전쟁, 산업화, 민주화, 경제 강국으로 도약하는 과정을 모두 다루려다 보니 현대사를 직접 경험한 성인들도 흐름을 쫓아가기 힘들 정도로 많은 사건과 인물이 계속 등장한다. 배경지식이 없으면 이해가 불가능한 설명, 도표들도 빼곡하게 이어져 나온다.

6·25전쟁이 어떤 것인지조차 잘 모르는 요즘 학생들에게는 선뜻 접근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처음부터 암기 또는 주입식 공부를 강요하는 꼴이다. 학습량이 많고 대표적인 암기 과목으로서 학생들에게 기피 대상이 돼온 역사교육의 고질적인 문제점이 이번에도 개선되지 못하고 있다.

일부 집필자의 편향성은 교과서 내용을 더 난해하게 만들고 있다. 이들은 북한 체제와 사회주의를 우호적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북한과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정반대 체제인 대한민국이 큰 발전을 이뤘다. 이런 자기모순이 교과서 내용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교과서 기술이 모호해지고 남한과 북한에 각기 다른 잣대를 적용하는 혼란이 빚어지고 있다.

원로 학자들이 ‘모범 교과서’ 편찬을

A교과서는 6·25전쟁 직전의 상황에 대해 ‘소련군과 미군이 각각 철수하자 38선을 둘러싼 충돌은 격화됐다’고 기술했다. 누가 충돌을 일으킨 것인지 밝히지 않은 기술이다. 반면에 B교과서는 ‘북한은 38선 일대에서 소규모 군사 충돌을 자주 일으켰다’고 적었다. 북한이라는 행위 주체를 명확히 한 것이다.

A교과서는 6·25전쟁 발발에 대해서도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은 전면적인 공격을 개시하였다’라고만 쓰고 있다. 이 단원의 큰 제목은 ‘전쟁이 산하를 찢어 놓다’라고 되어 있다. 그나마 C교과서는 ‘북한은 옹진반도를 시작으로 소련제 탱크와 비행기를 앞세워 전면적인 남침을 감행하였다’고 좀 더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수백만 명의 우리 민족을 살상한 전쟁을 일으킨 북한에 대해 단지 ‘전면적인 공격을 개시하였다’고 쓰고, ‘전쟁이 산하를 찢어 놓다’는 결과론적 제목을 앞세운 것은 집필자들이 북한을 의식한 균형일지는 몰라도 역사적 사실에 대한 균형은 아니다.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 등 인권 참상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이 ‘북한이 내세우는 우리식 인권의 주요 특성은 개인의 자유보다는 물질적 보장이 중요하다는 것’이라는 글을 뜬금없이 제시하고 있다. 북한 인권을 한국 시각에서 바라보면 안 된다는 의식을 학생들에게 심어주기 위한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학생들이 이런 내용을 보면 현대사가 더 어지럽고 골치 아프게 느껴질 것이 분명하다.

이 교과서를 놓고 좌편향 논란이 빚어진 뒤 집필자들은 협의회를 구성했다. 이들은 다른 전공학자까지 포함된 한국현대사학회가 20일 출범하는 것에 대해서도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역사가 역사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닌 이상 학회를 만들어 나름대로 현대사를 연구하겠다는데 거부감을 내비칠 이유는 없다.

역사학계가 대립하는 모습을 보일수록 한국사 과목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커지고 역사에 흥미 갖기를 포기하는 학생이 늘어날 것이다. 역사학계 원로들이 나설 필요가 있다. 교과서 집필을 젊은 학자나 교사에게 맡겨 놓지 말고 오랜 식견을 토대로 직접 모범적인 현대사 교과서를 만드는 것도 해법이 될 수 있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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