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 이해하기 20선]<11>문명의 충돌

  • 입력 2006년 8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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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까지 서구는 자신들의 문명을 가장 보편적인 문명으로 생각하고 이를 다른 국가나 민족에게 강요하는 것을 당연시했다. 그러나 이것은 오만이자 착각이다. (중략) 중동에서는 젊은이들이 청바지를 입고 코카콜라를 마시며 랩 음악을 듣지만 바로 그들이 메카를 향해 기도하고, 이라크는 즉각 응징하면서 같은 백인종인 세르비아의 행태에는 눈 감는 미국의 태도에 분개하고, 의기투합하여 미국 항공기를 폭파하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본문 중에서》

‘문명의 충돌’은 흥미롭고도 중요한 책이다. 이 책에서 헌팅턴은 다양하고 풍부한 자료를 능숙하게 버무려 냉전 이후 세계 정세를 바라보는 나름의 해석 틀을 제시한다. 무엇보다 이 책은 현실사회주의 붕괴 이후 세계 체제의 중심, 즉 ‘제국이 된 미국’의 속마음 한 결을 생생히 보여 준다.

1993년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지에 실려 세계적 논란을 야기한 논문에 살을 붙여 1996년 출간한 문명의 충돌은 오늘날 이데올로기나 경제적 가치 대신 언어 종교 민족 등 문화적 특질의 집합체로서의 문명이 세계적 경쟁과 갈등의 주체가 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그 연장선상에서 8, 9개의 문명권을 설정해 상이한 문명들 사이의 교차관계와 동역학을 분석한다.

문명충돌론은 세계 지식인 사회의 주목과 평가를 받았지만 그 안에 내재한 과도한 서구중심주의나 문화환원론적 경향은 숱한 비판의 표적이 되었다.

가령 헌팅턴의 내심이 드러나는 다음과 같은 대목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미래의 가장 위험한 충돌은 서구의 오만함, 이슬람의 편협함, 중화의 자존심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할 것”이므로 “서구 문명을 수호하기 위해서 미국과 유럽은 이슬람 국가들과 중화 국가들이 재래식, 비재래식 전력의 강화에 나서는 것을 견제”하고 “다른 문명에 대한 서구의 기술적, 군사적 우위를 유지”해야 한다고 썼다.

문명충돌론의 설명 틀이 지나치게 단선적인 경우도 눈에 띈다. 예컨대 ‘단층선 전쟁’을 논하면서 헌팅턴은 “이슬람이 국제적 위기 상황이 벌어졌을 때 폭력에 의존하는 경향이 남달리 높고”, “전투성과 화합불능성은 이슬람의 지속적 특성”이라고 단언하며 이를 ‘입증’하는 통계적 사실들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는 하나의 작은 사실로 더 큰 다른 사실들을 왜곡하는 ‘서구 외눈박이’의 전형적 시선이다.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침략은 말할 것도 없지만 이스라엘의 레바논 공격이 초래한 대량 양민학살에 대해서조차 못 본 체하는 미국 여론과 문명충돌론의 서구적 편향 사이에는 분명한 상관관계가 존재한다.

헌팅턴이 강조하는 것처럼 문명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종교다. 그러나 특정 종교에 본질적으로 폭력적 요소가 있다고 강변하는 헌팅턴 식의 논리는, 종교 교리와 폭력 사태가 직결되는 경우가 드물고 권력이나 정체성 투쟁의 와중에 종교가 간접적으로 연루되거나 책략가들에 의해 ‘동원’된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문명의 충돌은 시사적이지만 많은 허점도 지닌다. 이러한 점 때문에 문명충돌론은 ‘이론’으로서의 위상이 크게 손상되었다.

그러나 현실을 들여다보는 데 일정한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문명충돌론의 의의를 과소평가할 필요는 없다. 대표적 미국 지식인의 세계 분석 틀은 우리로 하여금 때로는 한반도라는 우물에서 벗어나 거시적으로 사유해 보라고 유혹한다.

윤평중 한신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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