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산책]슬픈 짝사랑의 추억…‘사랑을 놓치다’

  • 입력 2006년 1월 6일 03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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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쯤 이루지 못한 사랑에 가슴을 앓았던 사람이 더 공감할 법한 영화 ‘사랑을 놓치다’.사진 제공 영화방
한번쯤 이루지 못한 사랑에 가슴을 앓았던 사람이 더 공감할 법한 영화 ‘사랑을 놓치다’.사진 제공 영화방
멜로 영화는 만성근육통처럼 늘 같은 고통을 호소해 왔다. 애인은 불치병에 걸리기 일쑤였고, 파란만장한 고생담은 해피 엔딩으로 가는 다리이기 십상이었다. 늘 우는 애인의 울음에 둔감해지듯, 그래서 멜로는 가장 완강하고 상투적인 장르라 인식되어 왔다. 사랑을 현실로부터 멀게 만드는 환상 효과로서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 ‘사랑을 놓치다’는 멜로라는 만성신경증을 급성질환으로 바꿔 놓았다. ‘사랑을 놓치다’는 늘 아팠던 그곳이 아니라 우리가 추억이라 부르는 은밀하고 사소한 부위를 건드린다. 멀리 먼 곳에서 볼 수 있었던 ‘그들만’의 사랑이 아닌 우리의 사랑, 상상이 아닌 과거 속에 묻어 둔 사랑 말이다. 그들, 우재(설경구)와 연수(송윤아)가 불러낸 사랑은 지독히 현실적인 질감으로 채색된 미묘한 그것, 바로 추억이다.

영화의 첫 장면은 실연의 고통 앞에 맥없이 무너져 내리는 우재로부터 시작된다. 10년 전 친구였던 우재와 연수. 그러나 연수에게 우재는 단순한 친구가 아닌 입 안에 머무는 사랑이었다. 고백 한 번 못한 채 우재 곁을 맴도는 연수. 그럼에도 우재는 연수의 마음을 눈치조차 채지 못한다. 면회를 핑계로 찾아간 연수를 끝끝내 막차를 태워 돌려보내는 우재. 결국 그들의 인연은 그곳에서 끊겨 7년 후까지 공백으로 남게 된다. 2001년 우연히 두 사람은 재회하게 되고, 이혼녀가 된 연수와 삶의 틈바구니에서 전전긍긍하는 우재는 이 우연 앞에서 인연을 생각하게 된다. 사랑에 삶을 송두리째 바치던 20대를 지나 훌쩍 30대가 된 그들에게 사랑은 이제, 선택으로 다가온다.

대략의 줄거리에서 알 수 있듯 ‘사랑을 놓치다’는 한번쯤 사랑을 아파해 본 사람에게 더 공감이 갈 법한 작품이다. 사랑이란 심신을 바치는 헌신이라거나 영혼을 몇 센티미터쯤 움직일 충동이라 생각할 나이를 지난 이들. 그러니까 이제 사랑은 습관이거나 호르몬의 부작용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의 고백인 셈이다. 이는 ‘사랑을 놓치다’가 사랑의 환상이 아닌 사랑의 환멸 이후에 다가올 ‘사람’에 대한 이야기임을 보여 준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시간보다 혼자 지내는 각각의 일상에 카메라가 더 오래 머무른다거나 어머니(이휘향)의 솔직한 사랑에 묵묵한 시선을 준 까닭도 마찬가지이다. ‘사랑을 놓치다’의 사랑은 생로병사 희로애락의 행간에 숨어 있을 법한 사람살이의 한 구절인 셈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은 바로 현실성이다. 7년이라는 시간 동안 훌쩍 변해 버린 연수를 그저 “이혼했다”라는 한 마디로 압축하는 대사는 영화의 힘을 잘 보여 준다. 구질구질하게 설명하거나 부연하지 않고 영화는 그들이 처해 있는 삶의 지표를 간단히 제시한다. 그것도 아주 핍진(逼眞·진실하여 거짓이 없음)하게. 친구와 연인의 애매한 사이에서 하룻밤 정을 나누고 뒤돌아서는 장면 역시 그렇다. 영화는 한 번의 정사로 인해 그들이 얼마나 달라졌나보다는 단 한 번의 정사로 그들이 얼마나 달라지기 어려운가를 보여 주는 데 주력한다.

“사랑을 시작하기도 전에 사랑이 끝나네”라는 우재의 말은 영화의 메시지를 대신한다. 사랑을 안다고 믿기에 사랑을 시작조차 하려 하지 않는 자들, 그들의 사랑은 한번쯤 사람을 놓쳐 본 관객에게 가슴 아픈 충고가 되어 되돌아온다.

이루어지지 않을 마음이 두려워 가시처럼 따갑게 삼키는 때가 20대라면 아마도 30대는 새어 나올 마음과 말을 단속하는 나이일 것이다. 사랑은 늘 손에 담긴 물고기처럼 담겨 있기보다 빠져나가기 일쑤니까. 이제, 사랑을 안다고 믿어 움츠린 자들에게 ‘사랑을 놓치다’는 속 깊은 친구로 다가올 법하다. 그러니 영화가 끝날 때쯤 당신에게 이런 속삭임이 들리지 않을까? 어쩌면 당신, 지금 이 순간도 누군가를 놓치며 살고 있지 않느냐고. 2006년, 다른 멜로의 호흡, 기대할 만하다.

‘마파도’의 추창민 감독. 19일 개봉. 15세 이상.

강유정 영화평론가 noxk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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