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뷰]밀리언 달러 베이비…백만불짜리 ‘눈물의 펀치’

  • 입력 2005년 3월 2일 18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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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시네와이즈 필름
사진제공 시네와이즈 필름
이 영화는 덜 말함으로써 결국 가장 뜨겁게 말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식 ‘할리우드 미니멀리즘’의 결정판이다. 신중하지만 너무 많은 생각을 하진 않는 듯한 등장인물과 소중하지만 무척 대단한 이야기를 하진 않는 듯한 연출 태도는 어느새 마음을 깊이 파고든다.

○ 퇴물관장과 여성복서의 상처달래기

한때 잘 나가던 권투 트레이너 프랭키(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다 쓰러져가는 체육관을 지키며 혼자 사는 퇴물 관장이다. 그는 오랜 친구이자 은퇴한 복서로 지금은 체육관 청소부인 스크랩(모건 프리먼)과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고, 매주 성당 미사에 나가 신부에게 냉소적인 질문을 쏟아내며 사는 게 전부다. 어느 날 프랭키 앞에 31세 웨이트리스 매기(힐러리 스웡크)가 권투를 하겠다고 나타난다. 그녀의 끈질긴 요청에 프랭키는 마지못해 트레이너를 맡는다. 연전연승하는 매기. 그녀는 꿈에 그리던 세계 챔피언 타이틀에 도전한다. 하지만 진짜 이야기는 이제부터다.

‘밀리언…’가 감정선을 강렬하게 붙잡고 흔드는 건 이 영화의 ‘속도’와 ‘거리’가 가진 아름다움 때문이다. 핵심인물인 프랭키와 매기는 늘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생각하고, 그 생각의 속도로 말하고, 그 말의 속도로 움직이고, 그 움직임의 속도로 상대를 감싸 안는다. 또 카메라는 이런 두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 사연을 속속들이 밝히려 하지도, 두 사람의 바깥으로 떨어져 나와 냉정하게 관찰하려 들지도 않은 채 절묘한 거리에 선다. 이런 속도와 거리 때문에 관객은 두 사람이 되는 동시에 두 사람을 바라보게 되고, 그래서 더 아프다.

사람들로부터 거듭 상처 받으며 피해의식에 젖어 사는 프랭키는 역설적이게도 권투선수의 얼굴 상처를 귀신처럼 처리하는 ‘상처 전문가’다. 프랭키와 매기는 자신들에게 각각 결핍된 딸과 아버지를 서로에게서 찾고 느낀다. 두 사람은 모두 이젠 늦은 나이면서도 너무 늦어버린 나이와 싸우는 서로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상실감을 채워간다. “자기 자신을 먼저 보호하라”는 프랭키의 강박에 가까운 주문이 매기란 인물에 메아리쳐 프랭키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건 이 때문이다.

○ ‘모쿠슈라’의 의미를 찾아라

‘밀리언…’는 요철이 기막히게 들어맞는 이런 설정들을 일부러 느슨하게 풀어놓는다. 노인인 프랭키와 스크랩이 나누는 시답잖지만 인생을 꿰뚫는 농담들로 보폭을 조절하며 툭툭 ‘잽’을 던지던 이 영화는 느닷없이 프랭키와 매기를 가혹한 시험에 들게 하고는 선택을 강요한다. 영화는 프랭키가 매기의 가운에 새겨줬던 뜻을 알 수 없는 단어, ‘모쿠슈라’의 의미를 그녀에게 털어놓는 바로 그 순간에 마지막 ‘펀치’를 날린다. 주저하지 않는, 그렇다고 용기를 낸 것 같지도 않은 이 순간 프랭키의 표정은 단 한 번이지만 동시에 영화의 모든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빛을 향해 걸어가는 프랭키의 쓸쓸한 뒷모습에선 ‘시련’과 ‘구원’이라는 숙제를 평생 가슴에 품어온 75세 감독 이스트우드의 뒷모습이 보인다.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 등 4개 부문 수상작. 이스트우드가 제작 감독 주연 음악을 맡았다. 12세 이상 관람 가.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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