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호 칼럼]여운형, 박헌영, 이승만의 忌日

  • 입력 2004년 12월 15일 18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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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기일(忌日)이 같은 경우는 더러 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박정희의 10월 26일처럼. 그러나 세 사람의 그것이 일치하는 우연은 좀 드물지 않을까 싶다. 더욱이 같은 역사적 공간에서 길항(拮抗)하던 세 인물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같은 날 죽는다는 우연은.

여운형과 박헌영, 이승만. 1945년 이후 한반도의 운명이 결정되던 광복 공간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던 세 인물이 공교롭게도 기일이 같다. 온건 좌파의 영수로 좌우합작을 추진하던 여운형은 1947년 7월 19일 암살자의 흉탄에 쓰러졌다.

▼忌日같은 광복공간 주도 3人▼

공산당을 재건한 박헌영은 인민당, 신민당과 합당한 남로당의 지도자로 월북해 북한의 ‘인민공화국’ 수립에 참여해 초대 부수상 겸 외상이 됐다. 그러나 6·25전쟁 휴전 직후 남로당의 심복들이 숙청돼 외톨이로 감금된 그는 1956년 7월 19일 밤 ‘미 제국주의의 고용간첩 두목’으로 총살됐다.

이승만은 그의 ‘라이프 워크’라 할 대한민국 건국 후 무리수를 써가며 대통령직을 네 번째 맡으려다 학생혁명으로 권좌에서 쫓겨나 하와이 망명 중 1965년 7월 19일 임종했다. 극좌, 극우, 중도를 대표하는 이 세 지도자 사이에는 기일이 같다는 우연의 일치 외에는 어떤 공통점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적대하고 있었다.

광복 공간의 좌우대립을 방불케 한다는 오늘, 새로운 남남대립이라는 이념적 혼미 속에서 세 사람의 삶과 죽음이 시사하는 것은 무엇일까.

먼저 박헌영의 비극적 죽음. 그것은 스탈린의 옛 소련을 비롯해 한반도에서도 공산당이란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는 ‘이념적 동지’들의 결합체가 아니라 당내의 무자비한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당파의 간판임을 박헌영은 평생의 공산주의 운동과 스스로의 목숨을 통해 입증해줬다.

이승만의 2차 망명과 최후. 민주주의는 그 제도를 만든 대부(代父)조차 그를 공동화하는 건 용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1960년 4월의 학생들은 시위했다.

마지막으로 가장 먼저 광복 공간에서 사라진 여운형의 ‘정치적 요절’. 그렇다. 61세로 비명에 간 여운형은 자연인으론 그래도 회갑을 지낸 나이였고 56세에 처형된 박헌영보다 5년 더 살았으나 정치적으론 광복 후 너무 일찍 갔다. 1948년 이승만은 대한민국, 박헌영은 인민공화국 수립을 각각 주도했다. 여운형이 만일 1년 더 살았다면 1948년의 기로에서 어떤 선택을 했을까. 많은 가능성과 의문을 남겨둔 채 그는 너무 일찍 갔다.

좌우를 막론하고 여러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여운형은 광복 공간에서 특히 지식인과 젊은이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정치지도자였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새로운 문맥에서 1948년을 재조명하는 데에 엉뚱한 가정법과 정치적 환상을 낳게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움직일 수 없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일 것이다. 여운형은 공산당이 온건좌파 정당을 합당해 만든 남로당에 합류하지 않고 따로 근로인민당을 창당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공산당의 권력 장악을 위한 합당에 동조하지 않은 온건좌파 지도자로는 여운형 외에 독일의 쿠르트 슈마허 사민당 당수가 있다. 1947년 9월에 조직된 국제공산주의기구 ‘코민포름’은 그 창립선언문에서 프랑스의 블룸, 영국의 애틀리와 베빈, 독일의 슈마허, 이탈리아의 사라가트 등 사민주의자들을 ‘주적’ 제1호로 거명하며 비난했다. 여운형이 만일 몇 달 더 생존했더라면 코민포름은 그를 어떻게 보았을지….

▼이념적 혼미 그때와 너무 흡사▼

근래 공개된 옛 소련 측 자료에 의하면 1946년 평양을 방문한 여운형은 이렇게 하소연했다고 한다. “나는 좌익진영으로부터 이탈하고 싶지 않지만 이북과 박헌영이 나를 불신하는 것이 느껴진다. 반면에 미국인들은 나를 신임한다.” 북한의 공식역사에 그러한 여운형을 기록할 자리가 있을까.

이승만, 박헌영은 물론 여운형도 그러고 보면 그들의 삶을 조명할 역사는 북쪽이 아니라 남쪽밖에, 오직 대한민국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최정호 객원大記者·울산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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