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칼럼/김미진]‘점수 세대’ 나침반은 없을까

  • 입력 2004년 12월 2일 18시 3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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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커닝 혐의를 받은 적이 한 번 있다. 80년대 초반 미국에서의 일이다. 땅덩어리가 워낙 넓다 보니 미국생활에서 자동차는 필수품이다. 당연히 미국 땅을 밟은 후 제일 먼저 한 것이 운전면허를 따는 일이었다. 영어사전을 펴놓고 열심히 운전면허 책자를 공부한 나는 마침내 필기시험을 치르기 위해 시험장으로 갔다.

벌써 20년 전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운전상식과 법규에 대한 문제 30개와 도로 표지판에 관한 20개의 문제가 나오지 않았나 싶다. 도로표지판 문제는 그림으로 돼 있어 심심풀이 땅콩처럼 풀 수 있었다. 문제는 운전상식과 도로법규에 관한 것이었다. 이리저리 함정을 파놓은 문제를 풀긴 했는데 아무래도 두 문제가 아리송했다. 시험을 볼 때 답을 모르는 문제는 우선 제쳐두는 게 상책이다. 그러나 모르는 문제는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결국 모르는 문제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당황할 내가 아니었다. 내가 누구인가. 초등학교 때부터 사지선다형 문제풀이에 닳고 닳은 ‘대한의 딸’이 아닌가.

▼한국교육의 경쟁력은 찍기?▼

운전면허 필기시험은 오지선다형이었다. 다섯개 중 한개만 찍으면 된다. 나는 답이 균일하게 분포돼 있을 거라는 점에 착안해 각각의 답이 몇 개씩 되는지 정(正)자로 체크해 봤다. 그렇게 분리해 보니 2번과 3번 답이 하나씩 부족했다. 그래서 2번과 3번을 적당히 더해 답안지를 제출했다.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미국사람들도 서너 번씩, 심하면 예닐곱 번씩 떨어진다는 필기시험에서 단번에 만점을 받은 것이다. 한국교육의 최대 경쟁력, 바로 찍기가 아니겠는가. 그 위력이 여실히 발휘된 순간이었다.

그런데 시험관이 시험지 귀퉁이에 표시해 놓은 정(正) 자를 문제 삼았다. 영어회화도 잘 못하는 외국인이 만점을 받은 데다 이상한 표시까지 해놓았으니 의심하는 게 당연했다. 손짓 발짓을 동원해 결국 시험관을 납득시키기는 했지만 참으로 진땀나는 순간이었다. 시험관도 꽤나 황당했을 것이다. 무슨 소린지는 잘 모르겠고, 그렇다고 커닝을 했다는 결정적 증거도 없으니 어찌 난감하지 않았겠는가.

어느덧 20년의 세월이 흘러 나도 이제 대학 강단에서 시험관 역할을 하는 위치에 서게 됐다. 예전에는 엉덩이에 깔고 앉은 노트나 치맛단이나 옷깃에 감춰놓은 쪽지가 커닝도구로 쓰이곤 했다. 그런데 요즘은 커닝도구도 날로 진화해 휴대전화는 물론이요, 생전 처음 보는 온갖 첨단장비가 설쳐대는 통에 더욱 신경이 곤두선다. 간혹 커닝을 하다 결정적인 증거물이 포착돼 시험 중에 쫓겨나는 학생도 있는데 그럴 때마다 내 속도 편치 않다. ‘혹여 이 일로 저 학생의 인생이 망가지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고 ‘도대체 점수가 뭐기에’ 하는 회의감도 든다.

경쟁사회에서 시험은 필수적이다. 그렇다고 점수에 맹종하는 현실에 타당성을 부여할 수 는 없다. 연일 대학수학능력시험 부정행위로 언론이 들끓고 있는 지금, 보도를 하는 쪽도 보도를 접하는 쪽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번 사태는 수능 차원이 아닌 교육 전반에 대한 불신으로까지 확산돼 저 밑에서부터 총체적으로 흔들리는 듯한 강도를 보여주고 있다. 시험과 점수로만 점철된 한국 교육의 천박함이 어린 학생들을 모두 잠재적인 부정행위자로 몰아가고 있음을 절감한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도덕불감증에 아무런 여과 없이 전염된 듯 보여 참으로 안타깝다.

▼커닝에 내몰린 우리 아이들▼

교육철학자 루소는 ‘에밀’에서 “교육의 일차적 목표는 아동을 기존 사회의 나쁜 것으로부터 지키는 데 있지만, 종국의 목적은 이상사회의 조건을 만족시킬 만한 독립된 시민으로 키우는 데 있다”고 역설했다. 디지털 문명이 아날로그 시대를 추월한 지 오래다. 새로운 구조에는 그에 적응할 새로운 인간이념의 구축이 필요하다. 아직도 구시대적 이념논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현실 속에서 우리 아이들은 방향추를 잃은 미아처럼 방황하고 있다. 미래의 나침반을 세우고, ‘그래도 인생은 희망적인 거야’라고 말해줄 수 있는 이는 어디에 있는가.

김미진 객원 논설위원·소설가 usedream@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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