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의 서울]‘취화선’과 창덕궁 부용지

  • 입력 2004년 11월 5일 18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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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술하고 여자 없이는 붓을 들 힘조차 없는 사람이오.”

“언제까지 빈둥댈 거냐”는 상궁의 물음에 오원 장승업(최민식)은 태평하게 대꾸한다.

도화서(圖畵署)를 거치지 않은 환쟁이로선 꿈도 꿀 수 없는 대접이라는 정6품 벼슬을 받았지만 오원은 시큰둥하다. 하루 석 잔 이상은 안 된다는 어명이 떨어지자 물감을 구하러 나간다는 핑계를 대고 궁을 탈출해 주막으로 숨어들었다 붙잡히기도 한다.

그림 같이 아름다운 연못인 창덕궁 후원(비원·秘苑·서울 종로구 와룡동)의 부용지(芙蓉池) 앞에서 그는 그림을 그리는 대신 낙엽을 쓴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청나라 주재관 위안스카이의 생일에 바칠 그림을 그려야 하지만 오원 장승업은 붓 대신 비를 들고 창덕궁 후원 부용지에서 낙엽을 쓸며 소일한다(아래). 한때 비원으로 불렸던 창덕궁 후원은 부용지를 비롯한 아름다운 연못과 조용한 산책길이 이어지는 도심 속의 ‘선경’과 같은 정원이다. 장강명기자

“낙엽은 내가 쓸 테니 어서 들어가 그림이나 그리소.” 상궁이 잡아끌지만 장승업은 “나라 말아먹으려고 들어온 놈(청나라 주재관 위안스카이·袁世凱를 뜻함)에게 바칠 그림을 그리기는 싫다”며 거부한다.

장승업의 예술세계와 삶을 다룬 영화 ‘취화선’(2002년 개봉)의 이 짧은 장면은 ‘불운의 천재화가’로 불렸던 그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대목이다.

가장 한국적인 정원이라는 창덕궁 후원에서 오원은 왜 붓이 아닌 비를 들었을까. 영화는 그 이유를 직접적으로 설명하지는 않는다. 다만 오원이 궁에 들어가기 직전 스승 김병문(안성기)이 던진 질책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관객들은 짐작할 뿐이다.

“자네의 산수는 실경(實境)이 아닌 선경(仙境)이요, 소박한 현실이 아닌 과장일세.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이 땅의 고통스러운 삶을 있는 그대로 그릴 수는 없는가.”

사실 창덕궁 후원은 거대 도시 속의 실경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선경처럼 조용하고 단아한 정원이다. 정원 내에는 모두 6개의 연못과 정자 25동이 있으며 부용지는 그중에서도 그윽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에 따라 네모지게 만든 연못 위에는 연잎이 떠 있고 못 가운데에는 섬을 만들어 소나무를 심었다. 1795년 정조가 수원 화성을 다녀온 뒤 너무 기분이 좋아 규장각 신하들과 이곳에서 낚시를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부용지와 이곳의 정자 부용정(芙蓉亭)은 드라마 ‘대장금’ 촬영지로도 잘 알려져 있다. ‘대장금’에서 중종이 장금에게 간접적으로 사랑을 고백했던 곳은 부용지에서 조금 더 안쪽에 있는 연못인 애련지(愛蓮池).

창덕궁 후원은 개별 관람을 할 수 없고 정해진 시간에 입장해 안내를 받아야 한다. 11월에는 오전 9시15분부터 오후 3시45분까지 매시 15분, 45분에 입장할 수 있으며 12∼2월은 오전 9시45분부터 오후 3시45분까지 매시 45분에만 입장이 가능하다.

입장료는 만 7∼24세 1200원, 만 25세 이상 2300원. 창덕궁 홈페이지 (www.cdg.go.kr) 참조. 지하철 3호선 안국역 3번 출구에서 5분 거리.

장강명기자 tesomi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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