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의 서울]영화 ‘여우계단’과 옛 수도여고 터

  • 입력 2004년 11월 12일 17시 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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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교(廢校)’라고 하면 인적 없는 산간벽지가 먼저 떠오르지만, 서울시내 한복판에도 먼지 가득 쌓인 폐교가 한 곳 있다. 바로 용산구 후암동에 있는 옛 수도여고 건물이다.

수도여고가 2000년 동작구 신대방동으로 옮겨간 뒤 후암동의 학교 터는 사실상 방치돼 있는 상태다. 운동장을 인근 복지관에서 주차장으로 쓰고 간혹 용산구청이 주최하는 행사가 열리는 정도다.

외국인학교를 세우자는 서울시와 영어체험마을을 짓겠다는 시교육청간의 협의가 시간을 끌면서 노는 땅이 된 것.

그 와중에 어부지리로 이득을 보는 건 영화와 잡지화보 제작자들이다. 철거작업을 하지 않아 학교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 건물 안팎이 수천만원짜리 세트 못지않은 훌륭한 촬영장소가 된 것.


예술고등학교 여학생들의 억압과 욕구 불만, 집착을 공포물 형식으로 다룬 영화 ‘여우계단’(오른쪽 사진)은 서울 용산구 후암동의 옛 수도여고 건물에서 촬영했다. 수도여고가 옮겨간 뒤 건물 철거작업을 하지 않아 학교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이곳은 요즘 으스스하다기보다는 빛바랜 건물과 운동장에 낙엽이 짙게 깔려 가을의 운치가 느껴진다. 장강명기자

현재 상영 중인 한석규 주연의 ‘주홍글씨’의 경찰서 장면, ‘말죽거리 잔혹사’ 예고편, 서태지와 그룹 ‘신화’의 뮤직비디오 등이 이곳에서 촬영됐다.

특히 여고괴담 연작의 3편 ‘여우계단’(2003년 개봉)은 영화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촬영했다. 기숙사 장면과 여고생들이 기숙사로 오르내리는 계단인 ‘여우계단’에서 소원을 비는 장면 정도만 따로 만든 세트와 전주공전에서 찍었다.

공포영화라서 실제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는 섭외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여고괴담 1, 2편은 실제 학교에서 찍었는데 1편 촬영 섭외 때는 공포영화라는 사실을 숨겼다. 홍보가 될 줄 알고 건물을 빌려줬던 학교측은 나중에 영화를 보고 항의했다고 한다.

사실 ‘여우계단’은 실제 학교에서 촬영했더라면 개봉 후 학교측으로부터 항의를 더 많이 받았음 직한 영화다. 1, 2편과 달리 아무도 살아남지 못하는 데다 주인공인 네 여고생은 성격이 나쁘거나 귀신이 돼버린다.

약간이나마 희망을 이야기했던 전편들과 달리 ‘여우계단’의 학교는 질투와 증오, 욕구불만과 집착으로 가득 차 있다. 여고생들이 여우계단에 대고 소원을 빌지만 소원은 악몽이 돼 돌아온다.

영화 촬영 중에도 주연 배우들은 무서워서 화장실에 혼자 못 갔다고 한다. 박한별은 촬영 중 이곳에서 귀신을 봤다고 하는데, 영화 홍보를 위해 ‘만들어낸 소문’인지 진담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 제작진은 영화 개봉 전 홍보행사로 이곳에서 ‘폐교체험 이벤트’를 열기도 했다.

막상 수도여고 터를 가보면 차양이 찢어지고 건물이 퇴색해 묘한 느낌이 들지만 그다지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건물 내부는 개방하지 않지만 운동장에는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운동장 주변에 은행나무가 많은데 떨어진 낙엽을 쓸지 않아 의외로 정취가 있다.

석조 분수대에는 10m가 훨씬 넘는 은행나무 세 그루 등이 있는데 물이 나오지 않는 분수대와 쌓인 나뭇잎, 빛바랜 벤치가 사진 촬영하기에 좋은 풍경을 연출한다.

수도여고 터는 지하철 4호선 숙대입구역에서 걸어서 5분 거리. 2번 출구로 나와 갈월종합사회복지관을 지나면 있다. 수도여고 터에서 서쪽으로 15∼20분 걸어가면 나오는 효창공원은 3만7000여평의 부지에 백범 김구 선생과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묘가 있다.

장강명기자 tesomi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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