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칼럼]송호근/새로운 것들이 시작되고 있다

  • 입력 2004년 4월 15일 18시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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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이 끝났다. 열린우리당의 승리, 한나라당의 선전, 그리고 민주노동당의 입성을 축하한다. 이제 한 고비를 넘긴 것도 같다. 이번 선거를 보면서 한국정치가 그래도 조금씩 발전하고 있다는 안도감과 함께 약간의 희망도 갖게 되었다. 어느 때보다도 깨끗했고 조용했다. 과반수 점령을 향한 공세도, 수성을 위한 읍소도, 생존을 위한 호소전도 한국정치의 미래를 곰곰 생각하게 해 준 계기였다. 이번 총선은 한국정치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평가할 만하다.

우선 지역색을 상당부분 탈피한 전국 정당이 탄생했고, 계급정당이 등장했다. 이들이 탄생한 계기가 무엇이건 명실상부한 전국 정당은 장면 정권 이후 45년 만에, 계급정당은 최초로 중앙 무대에 진입했다. 이들은 몸집의 크고 작음을 떠나 아직 지역색을 못 벗은 다른 정당들과 함께 이념 경쟁을 치열하게 벌일 전망이다. 둘째, 정치인들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 국회는 갑자기 젊어진 주인들을 맞아 미래 대응적 방향으로 체질을 바꿀 것도 같다. 선거기간 중 후보자들이 거듭 다짐해 보인 대로 국회를 시민들에게 돌려줄 수도 있을 것이다. 셋째, 민노당의 등장으로 다당제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교섭단체 결성에는 실패해 모양새가 갖춰진 것은 아니지만 다당제는 양당 구도의 최대 약점인 ‘격돌의 위험’을 한층 낮춰 줄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시점에 ‘새로운 것들’이 시작되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리더십 정립을 둘러싼 투쟁, 즉 권력 투쟁이다. 선거전을 통해 부침을 거듭한 당내 파벌들의 재기와 굳히기 싸움이 예고되어 있는 것이다. 이 싸움은 4년 뒤로 예정된 대선(大選)의 향방과 직결되기에 사생결단의 쟁투로 치달을 공산이 크다. 그렇지 않아도 선거법 위반 시비, 보궐선거, 개혁 수순 및 강도를 결정하는 일로 2004년의 정치판은 무척이나 시끄러울 예정인데 당 내부의 위계정립과 개혁 원칙을 둘러싸고 조용할 날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듯싶다.

우선 정동영 의장은 원내 제1당 목표를 달성해 당 내외 입지가 한층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선거 3일 전 불거져 나온 선대본부장 사퇴는 권력투쟁의 한 징후로 비쳐 조금은 불안하다. 뭔가 사태의 급박성과 함께 내외부에서 가해지는 힘의 존재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가? 급진파와 온건파의 균열이거나 친노(親盧) 정통파와 비주류세력의 대립일 수도 있다. 의원들간 이념적 동질성이 크고 서로 호흡을 잘 맞춘다면 잠재된 내부 균열을 잘 다스려 갈 수 있을 것이다.

한나라당과 민노당도 예외는 아니다. 한나라당은 박근혜 대표를 정점으로 한 선거 공신그룹이 구실세들의 도전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관건이다. 그런데 구실세들이 불법 대선자금사건으로 이미 위축되었다는 점은 박 대표에게 운(運)이라면 운이다. 민노당은 갑자기 바뀐 환경에 얼떨떨한 심정일 것이다. 잘해 내겠지만 이념적 급진성은 금물이다. 더욱이 두 개의 분파인 민족해방(NL)파와 민중민주(PD)파가 서로 화음을 잘 맞출 수 있을 것인지도 중요하다. 오랜 투쟁 경험과 조직 경험이 그런 균열의 개연성을 낮출 것이다.

민주당은 해체 위기에 직면했다. 호남 민심은 민주당을 버리고 말을 갈아탔다. 그렇다고 호남지역에서 지역정당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고 하기에는 아직 시기상조다. 우리당이 지역이해를 보편적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정치를 선보인다면 영남에서도 지역정당의 기반은 점차 약화될 것이다. 문제는 당권 장악과 정체성 확립을 둘러싼 당내 투쟁에서 총선을 이끈 리더들이 ‘과도기적 관리자’인지 아니면 진짜 실세인지가 판가름 난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진짜 실세로 등극한다 해도 과연 ‘대선주자’가 될 것인가는 또 다른 문제다. 카리스마가 사라진 대통령제하에서는 정당 지도자보다 대중적 인기몰이에 능한 스타가 대선 주자로 떠오를 가능성이 더 많기 때문이다. ‘불확실성’이야말로 대통령제의 최대 약점이자 정치적 흥행을 부추기는 매력의 포인트다.

송호근 객원논설위원·서울대 교수 사회학 hknsong@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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