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미기자의 감성크로키]오늘의 커피

  • 입력 2004년 4월 8일 15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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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커피 빈’의 회전 문을 밀고 들어가 ‘오늘의 커피(Today's Coffee)’를 주문한다.

오늘의 커피는 이 카페가 매일 한 품목씩 특별히 정해 제공하는 원두커피이다.

상냥한 미소의 종업원은 “오늘 커피는 약간 진한데요”라고 말해 준다.

“괜찮아요.”

오늘의 커피를 주문하는 손님은 어떤 성향일까 추측해 본다.

첫째, 단 맛을 싫어하며 커피 고유의 맛과 향을 즐기는 마니아일 것이다.

둘째, 매일 그 카페에 들르는 단골일 확률이 높다. 자주 방문하기 때문에 고정 메뉴를 시켜도 다양한 커피를 마실 수 있다.

셋째, 다른 커피에 비해 가장 저렴하다.

넷째, 일체의 향료를 배제한 오늘의 커피가 가장 세련됐다는 이미지의 허영을 누린다.

추측을 검증하기 위해 일요일 오후 커피빈 광화문점 종업원들에게 확인했다.

오늘의 커피 손님은 전체 음료 손님의 20%쯤 된다. 오늘의 커피 손님 중 거의 매일 들르는 단골은 30%가량이다. 그들은 커피 이외에 우유나 생크림이 들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473ml 레귤러 사이즈보다는 355ml 스몰 사이즈를 찾는 손님이 더 많다. 진한 커피와 순한 커피가 분류돼 있는 것이 아니라, 순한 커피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진한 커피에 뜨거운 물을 부어 준다.

흥미로운 사실은 오늘의 커피가 오늘의 커피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10여 종의 원두커피를 돌아가며 선정하는 오늘의 커피는 100컵 이상 나오는 2.2kg 원두 팩 두 개가 소진되면 다른 종류의 커피로 바뀐다.

“30분쯤 후면 오늘의 커피가 수마트라에서 콜롬비아로 바뀝니다.”

같은 오늘의 커피인데, 아침에 마신 커피와 저녁에 마시는 커피의 종류가 달라졌다.

그래도 오늘의 커피는 오늘의 커피이다.

15세기 유럽 인쇄술을 발명한 구텐베르크의 이름은 실은 가문의 이름이 아니라, 그가 살았던 집의 이름이었다.

오늘의 커피를 앞에 두고 뜬금없이 문자를 칭송하노니, 문자는 인간 사고의 집이다. 오늘의 커피라고 적힌 푯말이 내걸리는 순간 그것은 오늘의 커피가 된다. 양피지에 화려한 장식으로 필사한 근대 고급품 가치는 잃었지만 문자에게는 자극적이거나 경박하지 않은 영혼이 있다.

이미지와 소리의 과잉 시대에 오늘의 커피는 그 단어만으로도 오늘의 기분과 호흡을 정돈해 주는 묘한 매력을 갖고 있다.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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