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정영문 작 김광보 연출 '당나귀들'

  • 입력 2003년 5월 18일 17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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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성 강한 소설가 정영문과 최근 대학로에서 가장 ‘바쁜’ 연출가 김광보가 만나 만든 연극 ‘당나귀들’. -사진제공 국립극단
실험성 강한 소설가 정영문과 최근 대학로에서 가장 ‘바쁜’ 연출가 김광보가 만나 만든 연극 ‘당나귀들’. -사진제공 국립극단
나라는 외적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해 있다. 적의 숫자가 아군의 숫자보다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장군과 신하는 고민에 빠진다. 싸울 것인가, 항복할 것인가. 그런데 너무 많은 고민을 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에 이른다.

“한데 숫자가 적다고 해서 반드시 불리한 것만은 아니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그 불리함을 극복하고 싸움에서 이기는 경우도 종종 있으니까. 그런 때면 좀 더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우니까. 그래서 때로는 수적인 불리함이 유리한 경우도 있지. 이 사실에 비춰보면 우리가 결코 불리한 것만은 아닌 것 같아. 아니, 우리가 불리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유리한 것 같은데. 아니, 절대적으로 유리한 건 절대적으로 불리한 우리 쪽 같아….”

이렇게 말을 하면 할 수록 헤어나올 수 없는 함정이 된다. 기발한 ‘말장난’은 연극 ‘당나귀들’에서 수없이 등장하는 대사 중 하나다.

작가 정영문(오른쪽)과 연출가 김광보. -사진제공 국립극단

최근 문단과 연극계에서 주목받는 소설가와 연출자가 무대에서 만났다. 국립극단이 199회 정기 공연으로 올리는 ‘당나귀들’은 작가와 연출자의 예사롭지 않은 면면으로 눈길을 모은다.

희곡을 쓴 소설가 정영문(38)은 96년 등단 이후 난해하면서도 실험성 강한 작품으로 문학계의 관심을 받아왔다. ‘당나귀들’은 그의 희곡 데뷔작으로 지난해 국립극장 창작 희곡 공모에 당선한 작품이다. 당시 심사위원들에게서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부조리극적인 형식에서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힘이 대단하다”는 평을 받았다.

연출자 김광보(39)는 동아일보 설문조사 ‘프로들이 뽑은 우리분야 최고’에서 연극인들에게서 가장 기대되는 차세대 연출자로 뽑힌 인물. 올해 연극 6편을 잇달아 올릴 정도로 가장 바쁜 연출자로 손꼽힌다.

시대와 장소도 알 수 없이 외적이 침입했다는 상황만 설정된 한 나라를 배경으로 삼은 연극은 사건 대신 공허한 대화가 지배한다. 예를 들어 장군을 애타게 찾아나선 신하가 그를 만나 “저희가 장군님을 얼마나 찾았는지 아십니까?”라고 묻자 장군이 “나를 찾는 것을 못 봤으니 그건 모르겠는걸”이라고 넘어가는 식. 작가 정영문은 “말은 너무나 무성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는 말의 ‘무력감’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작가가 “사무엘 베케트의 영향을 받아 희곡을 쓰게 됐다”고 말한 것처럼 이 작품은 부조리극을 표방한다. 때문에 극적인 줄거리도 없다.

관객들이 난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작품이지만 김광보는 이 희곡을 경쾌하고 풍자적으로 풀어냈다. 배우들에게도 “연극을 한 가지로 규정하려고 하는 순간 이 연극은 끝장이 난다”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엮어가라고 강조한다. 그는 “연극계에 발을 들여놓은 지 20년, 연출을 맡은 지 10년 만에 모처럼 ‘강적’을 만났다”고 말했다. 희곡을 처음 읽을 때와 두 번째 읽을 때가 전혀 다른 느낌이라는 것. 어떻게 해석할까를 고민하다 결국 “가장 일상적인 모습으로 풀어내지 않으면 버겁다”는 결론을 내렸다. 의식적인 ‘대사’가 아닌 단순한 ‘대화’로 희곡이 가진 말의 묘미를 최대한 살렸고, 여기에 웃음을 더했다. 연극은 때로 폭소를, 때로 실소를 자아내며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처럼 흘러간다.

제목 ‘당나귀들’은 스스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인물 군상을 당나귀 우화에 빗대 붙였다. 당나귀는 두개의 당근을 동시에 주면 어떤 것을 먹을지 고민하다 결국 굶어죽는다는 것.

이문수, 오영수, 정규수, 김재건, 문영수, 김종구 등 출연.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22∼30일. 평일 7시30분, 토요일 4시, 7시30분. 일요일 4시. 1만5000원∼2만원. 02-2274-3507∼8

주성원기자 s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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