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내 ‘주한미군 철수론’ 부상…보수파 "한국과 이혼할때 됐다"

  • 입력 2003년 1월 9일 17시 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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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주한미군 철수 여부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아직 미국 정부가 공식 반응을 보일 만큼 철수 논란이 확산된 것은 아니지만 워싱턴 포스트는 이처럼 심각하게 논란이 벌어진 것은 지미 카터 행정부 이후 처음이라고 8일 전했다. 70년대와 달라진 것은 당시는 민주당을 비롯한 진보진영에서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한 반면 지금은 보수진영에서 이를 제기하고 있다는 것. 보수 논객들은 한국의 반미감정에 격앙돼 논리와 감정이 뒤섞인 철수론을 주장하고 있다.》

▽감정적 반응=폭스 TV 뉴스 채널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뉴스 토크쇼 ‘빌 오레일리 팩터’로 인기를 끌고 있는 앵커맨 빌 오레일리는 6일 “왜 우리가 한국으로부터 그런 수모를 당해야 하느냐. 당장 주한 미군을 빼라”고 말했다.

150개의 신문에 칼럼이 실리는 대표적 보수논객이자 CNN방송의 진행자인 로버트 노박은 6일 워싱턴 포스트 기고문에서 “한국은 미국인들에 대해 싫증이 났고 미국인들은 한국인들에 대해 점점 참을 수 없게 돼 가고 있다”면서 “한국으로 하여금 자신을 책임지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수성향의 싱크탱크 케이토연구소 선임연구원인 더그 밴도도 같은 날 보수성향의 격주간지 내셔널 리뷰 인터넷판에서 ‘한국과 이혼할 때’라는 제목의 글을 싣고 “미국의 보호를 원하는 국가는 미국이 명령하는 것에 불만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썼다. 그는 여중생 참사사고를 낸 미군의 재판권과 관련해 “미국이 한국을 보호하는 한 미군에 대해 특별한 대우를 요구할 수 있다”며 “사실상 (미국의) 보호령인 국가는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울러 한국이 미국에 국방을 의존하는 한 동등한 한미관계란 있을 수 없다고 덧붙였다.

▽노 당선자에 대한 불만=보수진영은 특히 노무현(盧武鉉) 대통령당선자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노박씨는 “‘과거 좌익 운동가’였던 노 당선자가 북한과 미국간에 중재를 제안했다”면서 “사실상 그는 한때 불굴의 반공 요새였던 한국을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스탈린식 국가와 자유세계의 지도자 사이의 중간에 놓으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추종자인 노 당선자는 한술 더 떠 엉클샘(미국)의 수염을 잡아당기고 있다”고 말했다.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 특보와 유엔대사를 지냈던 케니스 아델만은 폭스 뉴스에 출연해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가 말했듯이 소방대와 화재 사이에서 중립적 위치를 지키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며 “한국의 새 정부는 그들의 보호자와 적을 동등시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논리적 근거=최근 들어 주한미군 철수론을 처음으로 제기한 사람은 뉴욕 타임스에서 유일한 보수성향의 칼럼니스트로 꼽히고 있는 윌리엄 새파이어.

리처드 닉슨 전 미 대통령의 연설문 작성자로 유명한 그는 지난해 12월 26일자 칼럼에서 “만일 주한미군이 비무장지대(DMZ)를 넘어 내려오는 (북한) 공격의 인질이 돼 있지 않았다면 미국은 북한의 위험천만한 핵시설들을 제거하는 데 훨씬 폭넓은 재량권을 가졌을 것”이라고 썼다. 주한미군이 오히려 북한의 핵시설을 공격하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것.

그는 “미 지상군이 한국에 주둔하는 것은 100만이 넘는 북한군이 공격할 경우 (직접) 막아내기보다 미 공군과 해군이 자동 개입해서 한국군을 도와 주기 위한 것”이라며 지상군 주둔의 실효성이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2일자 칼럼에서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한국에서 조롱받고 있다”며 “오직 북한에 인질로 잡혀있을 뿐인 미군을 철수시키고 남북한이 서로 대담한 대화를 나누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87년부터 주한미군의 철수를 주장해 왔던 밴도씨는 “한국이 국내총생산(GDP)에서 북한보다 40배나 많고 인구는 2배이며 현격한 기술적 우위를 점하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스스로 방어할 능력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군은 최신무기가 90년에 생산된 것일 만큼 노후돼 있고 예비부품도 없다”면서 “이처럼 파산한 북한군을 방위하는 데 미군이 필요치 않다”고 말했다.


홍은택기자 euntack@donga.com

▼美행정부 “미군주둔 필요”▼

미국 행정부와 의회는 최근 미국 내 일부에서 고개를 들고 있는 주한미군 철수론에 대해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아직은 “북한의 군사적 모험 욕구 억제 역할은 물론 동북아 정세의 안정을 위해 미군 주둔이 필요하다”는 기본 입장에서 변화했다는 기미는 없다. 반대로 주한미군 철수가 가져올 부작용을 우려해 철수론 확산을 경계하는 발언들도 잇따르고 있다.

윌리엄 코언 전 미 국방장관은 7일자 워싱턴 포스트 칼럼에서 “주한 미군이 철수하면 동북아 지역에 힘의 공백이 생기고 지역 불안정이 심화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미군이 철수하면 중국이 힘의 공백을 차지하려 할 것이고 그러면 일본은 핵무기 자체 개발로 중국에 맞설 것이며 인도도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영향력 확장에 나설 것”이라며 “이 같은 불안정성과 군사적 충돌 잠재성이 세계경제에 미칠 영향은 심대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동계훈련 중인 주한미군 병사들. -동아일보 자료사진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전 백악관 안보보좌관도 5일자 뉴욕 타임스와의 회견에서 “주한미군이 철수하면 중국은 남중국해와 대만해협에서 자신의 군사력을 과시하려 할 것이며 북한은 핵무기 개발을 계속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사실 미국 정부의 입장에서 볼 때 군사 외교적 측면에서 주한미군이 갖는 전략적 가치는 예전에 비해 별로 줄어들지 않았다는 게 워싱턴 외교 전문가들의 주된 견해다.

미군의 한반도 주둔이 갖는 심대한 상징성, 즉 “주한미군의 존재가 북한은 물론 중국의 정치, 군사적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고 동북아 정세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는 데 있어 중심추 역할을 하고 있다”는 미국 내 지도급 인사들의 인식에 큰 변화는 없는 상태다.

데니스 블레어 전 미 태평양 사령관은 “태평양을 건너오는 시간을 감안하면 하와이나 샌디에이고에 있는 병사 한 명보다 한국이나 일본에 있는 한 명이 훨씬 더 중요하다. 북한의 위협이 사라진다 해도 미국은 아시아지역의 위기상황에 대비해 한반도에 군대를 주둔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공화당은 물론 민주당도 자국의 전략적 이익보다 ‘반미 시위’ 등의 감정적 요소를 주한미군 철수 여부에 대한 판단의 우선 순위에 둘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배적인 분석이다.

하지만 뉴욕 타임스가 기사의 말미에 덧붙였듯 한국이나 일본에서 일고 있는 반미 시위 등의 영향으로 해외 주둔 미군의 철수 논란이 의회로 번질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워싱턴 포스트는 8일 일부 민주당 의원들도 주한미군의 철수론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필리핀 미군철수땐▼

주한미군 철수 가능성을 이야기할 때 자주 거론되는 게 1990년대 초 필리핀 주둔 미군의 철수다.

미국에 필리핀 기지는 유사시 인도차이나 반도에 개입하기 위한 교두보인 동시에 한국 일본으로 이어지는 아시아 삼각 안보 체제의 한 축이었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 종전 이후 상대적으로 전략적 중요성이 감소된 게 사실이었다.

미국은 1901년에 수비크만 해군 기지를 설치한 이래 1947년 필리핀 내 미군기지를 임대료 없이 99년간 사용한다는 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이후 수 차례의 개정을 거치는 와중에 필리핀 내 자주 국방 여론과 반미 시위가 거세졌다.

1991년 완전 철수 전에 미국과 필리핀은 기지 협상을 통해 클라크 공군기지 완전 반환, 수비크만 해군기지 10년 사용 기간 연장 등에 합의했지만 필리핀 의회는 완전 철수를 고집했다. 특히 1991년 6월 피나투보화산 폭발로 클라크기지와 수비크만기지가 피해를 보자 2만명 이상의 미군과 가족이 철수했다. 당시 아시아 지역 국가들 사이에서는 미국이 아시아에 대한 관여를 줄임으로서 힘의 공백이 생길 것이라는 우려가 팽배했으며 미국은 철군한 미군 대부분을 싱가포르 일본 등 태평양 지역 기지들에 재배치해 공백을 최소화했다.

이기홍기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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