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다시 싸워야 할 때” 맨해튼서 10년 만에 열린 월가 시위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2월 1일 15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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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에도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그 후 빈부격차는 더 심해졌고 전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31일 낮 미국 뉴욕 맨해튼 남부의 주코티 파크에는 영하의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수십 명의 시위대가 몰려들었다. 주코티 파크는 2011년 벌어진 ‘월가 점령 시위’의 거점으로, 당시 시위대는 월가 금융회사의 탐욕과 소득불평등에 맞서 수개월 동안 노숙 농성을 했다.

이날 주코티 파크가 다시 시위대에 ‘점령’당한 것은 헤지펀드 등 금융 자본의 행태에 대한 개인투자자들의 분노가 다시 폭발했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의 개인투자자들은 헤지펀드가 공매도한 주식을 집중 매수해 이들에게 엄청난 손실을 입히는 대반란을 일으켜 주목을 받고 있다.

시위에 참여한 배쓰라는 이름의 백인 여성은 기자와 만나 자신이 2011년 월가 점령 시위에도 참여했었다고 말했다. 그는 “월가는 사람들의 돈을 빼앗고 있고, 난 팬데믹으로 일자리를 잃었다. 이제 다시 싸워야 할 때”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추운 날씨 때문인지 참가자가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기자들과 방송 카메라가 대거 몰려들며 이날 시위는 나름 주목을 받았다. 시위대와 조금 떨어져서 ‘오늘은 금융인들의 마음만큼이나 날씨가 차갑다’(It‘s almost as cold as a banker’s heart)는 팻말을 들고 있던 한 흑인 여성은 기자에게 “일반 투자자와 월가는 공정한 경쟁을 하고 있지 않다. 그걸 바꾸기 위해 이 자리에 나왔다”고 말했다.

이번 시위는 ‘월가를 재점령하라’(Reoccupy Wall Street)라는 이름으로 ‘뉴욕의 젊은 공화당원’이라는 단체가 주최했다. 10년 전 월가 점령시위가 주로 좌파 운동가의 참여로 이뤄졌다는 것을 감안하면 다소 뜻밖이었다. 실제 이날 시위대 중에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슬로건인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가 적힌 모자를 쓰고 나온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주최 측은 이날 시위가 특정 정파의 행사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실제 참가자들 중에는 자신은 공화당 지지자가 아니라는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이날 시위대를 앞장서서 이끈 흑인 남성 비시 부라 씨는 “이건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와 ‘그들’ 간의 싸움”이라면서 “민주당원이든, 사회주의자든 모두를 환영한다”고 말했다. 이 단체의 대표인 개빈 왁스 씨는 “헤지펀드들은 공매도를 통해 기업을 굴복시켰고 자기 이익을 위해 시장을 조작했다”며 “이건 완전한 부패고 이중 잣대다. 오늘은 끝까지 가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실제 이번 반란을 주도한 개미 투자자들은 정당과 무관하게 워싱턴 정가의 고른 지지를 받고 있다. 의회에서 가장 진보 인사로 분류되는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민주당 하원의원과 트럼프 전 대통령의 측근 테드 크루즈 공화당 상원의원이 투자자들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거의 동시에 발표한 게 단적인 사례다. 이에 대해 뉴트 깅그리치 전 공화당 하원의장은 뉴욕타임스에 “이는 공화당이냐, 민주당이냐의 문제가 아니다”며 “2008년 금융위기 때 당했고 이번에도 당했다는 생각이 드는 수많은 일반 시민들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미국 개미들의 토론게시판인 레딧에도 정치적인 견해를 선명히 나타내는 사람들은 찾기 힘들다. 2008년 금융위기로 자신의 삶이 망가진 얘기, 경제 파탄의 책임을 지지 않고 살아남은 거대 금융회사에 대한 분노 등이 이들의 주된 이슈다. 실리콘밸리를 지역구로 둔 로 칸나 민주당 하원의원은 “이번 일은 금융 규제를 강화하고 불평등을 해소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의회에 각인시켜줬다”며 “2008년 금융위기 때부터 쌓여왔던 것이 이제 임계점에 다다른 것 같다”고 말했다.

뉴욕=유재동 특파원 jarret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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