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역사의 기록을 철거하라”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9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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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곳곳서 기념물과의 전쟁

“오늘 우리는 치유를 부르는 정의로운 한 걸음을 뗐습니다.”

지난달 30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시의회는 ‘역사의 승리’를 외쳤다. 연방 휴일인 10월 9일 ‘콜럼버스의 날’을 ‘원주민의 날’로 바꾸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주도한 한 시의원은 “역사 기록은 분명하다. 구글 검색만 해도 알 수 있다”며 금 채취를 위해 원주민을 노예로 삼고 절멸시켰다는 평가가 나오는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공휴일의 주인공이 될 자격이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남부연합 로버트 리 장군 동상 철거 논란에 백인 우월주의 시위대가 합세하면서 유혈충돌이 빚어진 ‘샬러츠빌 사태’로부터 약 한 달이 지났다. 그사이 ‘미국 내 기념물과의 전쟁’ 전선은 19세기에서 15세기로 확대된 모양새다. 이달 중순엔 뉴욕 센트럴파크의 콜럼버스 동상이 페인트로 훼손됐고, 지난달 29일엔 뉴욕주 용커스의 콜럼버스 흉상의 머리가 잘렸다. 일부 극좌단체는 10월 9일을 ‘콜럼버스를 지우는 날’로 선언하고 행동을 촉구하고 있다.

기념물을 둘러싼 역사전쟁은 미국의 전유물이 아니다. 철 지난 권력의 유산이 어떤 형태로든 공공장소에 남아 있는 곳이라면 비슷한 전투가 벌어진다.

폴란드는 기념물 철거로 러시아와 외교 갈등까지 벌이고 있다. 폴란드는 6월 탈(脫)공산화법 개정안을 의회에서 통과시키고 다음 달부터 옛소련 기념물 230여 개 철거를 시작하겠다고 예고했다. 비톨트 바슈치코프스키 폴란드 외교장관은 러시아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옛소련은 독일과 불가침조약으로 2차 대전을 촉발시켰다”며 반러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러시아의 니콜라이 하리토노프 하원의원은 “폴란드와의 모든 교역을 끊어야 한다”고 발끈했다. 러시아 상원의 블라디미르 자바로프 외교위원회 부위원장은 “건의되는 모든 제재안을 지지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러시아는 법안에 찬성한 폴란드 의원들의 러시아 입국 금지도 검토 중이다.

우크라이나는 옛소련 지우기에서 폴란드보다 한발 앞서 있다. 우크라이나 국가기억위원회의 블라디미르 뱌트로비치 위원장은 지난달 16일 “이제 이 땅에 레닌 동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우크라이나는 2015년 탈공산화법이 통과된 이후로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레닌 동상 1320개를 포함한 총 2389개의 구소련 기념물을 모두 없앴다. 올 초엔 소도시 초프의 레닌 동상이 경매에서 1만 달러(약 1100만 원)에 팔렸다. 고철값보다는 비싸다지만 레닌의 굴욕이다.

과거 신대륙을 찾아 나선 백인 탐험가들이 도착한 지역에서도 미국과 비슷한 역사 전쟁이 진행 중이다. 캐나다에선 원주민 강제 교육으로 ‘문화 학살’을 저질렀다는 비판이 나오는 초대 총리 존 맥도널드의 동상들과 관련 명칭들을 철거 및 변경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호주에선 시드니 하이드공원 내 제임스 쿡 선장의 동상에 적힌 ‘1770년에 (호주) 영토를 발견’이라는 문구가 논란이 되고 있다. 오래전부터 살아온 원주민들은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논란의 대상을 고철 덩어리로 만들어 버리자는 구호는 한쪽에서 열광적 호응을 부르지만 우려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우크라이나 키예프 시의회는 ‘아픔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기억한다’는 목표 아래 올가을 ‘소련 프로파간다 기념물 박물관’ 개관을 준비하고 있다. 빌 쇼튼 호주노동당 대표는 논란의 쿡 동상에 대해 철거도 존치도 아닌 역사의 맥락을 설명하는 안내판을 설치하자는 대안을 내놨다.

한기재 기자 record@donga.com
#역사#원주민의 날#기념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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