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대만 언론 재조명 ‘6·4 톈안먼(天安門) 사태’ 20주년을 앞두고 굴곡과 영욕으로 점철된 당시 주역들의 다양한 삶의 스펙트럼이 홍콩과 대만 언론을 중심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6·4 사태로 실각한 자오쯔양(趙紫陽) 총서기의 정치비서 바오퉁(飽동·77) 씨는 7년간 옥살이 후 현재도 베이징(北京) 자택에서 반(半)연금 상태다. 인터넷 접속이 불가능하며 6·4 기념일이나 양회(兩會·전국인민대표대회와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기간 등에는 외부와 전화통화도 안 된다. 미국에서 활동 중인 그의 아들 부부가 최근 자오 전 총서기의 회고록을 출간하자 그의 거처는 베이징 외곽 어딘가로 옮겨진 것으로 알려졌다. 베이징대 학생으로 톈안먼 사태 학생지도자 3인방 중 한 명인 왕단(王丹·40) 씨는 7년 복역 후 1998년 빌 클린턴 당시 미 대통령의 방중을 계기로 풀려났다. 미국과 영국에서 민주화활동을 계속했으며 9월부터 대만 국립정치대에서 교수로 일할 예정이다. 베이징사범대 학생으로 베이징지역 대학연합회장이었던 신장(新疆)위구르 자치구 출신의 우얼카이시(吾爾開希·41) 씨는 프랑스와 미국에서 유학 후 민주화운동을 계속하다 지금은 대만에서 TV 사회자로 활동 중이다. 베이징대 학생이었던 슝옌(熊(염,혁)·45) 씨는 1992년 미국으로 망명한 뒤에는 정치와 거리를 두고 앨라배마에서 군목으로 활동했다. 그는 최근 이례적으로 홍콩 입국을 허락받아 6·4 20주년 행사에 참석해 “톈안먼 강제진압 당시 군이 10분 만에 30명을 총으로 쐈다”고 증언했다. 1989년 런민대 교수였던 딩쯔린(丁子霖·73) 여사는 아들(당시 17세·고등학교 2학년)이 6·4 사태로 숨지자 희생자 어머니들의 모임인 ‘톈안먼의 어머니’를 조직했다. 철도 노동자로 6·4 사태에 참가했던 한둥팡(韓東方·44) 씨는 1993년 홍콩으로 넘어와 잡지 발행 등으로 대륙의 노동자 인권 개선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6·4 사태 진압에 투입된 탱크를 막아서는 사진 한 장으로 ‘민주화 항쟁’의 상징적인 인물이 됐던 왕웨이린(王維林·39) 씨는 현재 대만고궁박물관에서 일하고 있다. 홍콩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6·4 사태가 대중의 기억 속에서 흐려지고 있지만 당시 주역들에게는 아직도 살아 있는 역사”라고 전했다. 베이징=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