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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9년 1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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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대표적 석학 기 소르망은 지난해 12월 말 파리 근교 자택에서 가진 본보의 신년 인터뷰에서 올해 세계 경제가 침체(Recession)를 겪겠지만 공황(Depression)으로까지 악화될 위험은 없다고 내다봤다. 그러나 각국 정부가 폴 크루그먼의 뉴딜식 제안을 더 밀고 나가면 그야말로 위험한 일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한국의 경제적 위상에 대해서는 한국이 주요 14개국(G14)에 포함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의견을 밝히면서 만약 한국이 포함되지 않는다면 한국의 외교 역량이 그만큼 부족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최근 경제위기는 밀턴 프리드먼으로 대표되는 시카고학파의 실패를 의미하는가.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먼저 그렇지 않다는 점에 대해 설명하겠다. 시카고학파는 장기적 경제성장이 통화 안정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다시 말해 인플레이션이 성장의 가장 큰 적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1970년대에 이런 생각은 아주 혁신적인 것이었다. 당시 많은 정부가 인플레이션을 용인하면서 인위적으로 화폐를 찍어 재앙을 자초하고 있었는데 이후 거의 모든 정부가 시카고학파의 주장을 받아들여 화폐의 안정에 힘썼다. 그러나 프리드먼의 잘못은 시장이 언제나 스스로를 규율할 수 있다고 생각한 점이다. 그는 정보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했다. 시장은 정보의 불투명 때문에 스스로를 규율하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 정보의 투명성을 위해서 정부나 독립적 기관이 개입해야 할 부분이 있다. 시카고학파가 실패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시카고학파를 넘어서야 한다고는 말할 수 있다.”
―자유시장의 이념이 경제위기로 타격을 입었는가.
“바야흐로 글로벌 트렌드는 정부의 시장 개입이다. 여기에 대해 두 가지를 언급해야겠다. 자유시장이 가장 좋은 시스템이라고 해서 그것이 완전한 시스템임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과 뉴딜정책은 경제적으로 완전히 무용하다는 것이다. 뉴딜은 정치적 게임에서만 유용하다. 경제적으로는 그것이 어떻게 유용할 수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성장의 엔진은 혁신과 교역이지 소비자(유권자)의 요구가 아니다. 혁신과 교역이 없다면 정부 지출은 무용하다. 크루그먼은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계속해서 더 많은 돈을 투입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정부 지출로 발생할 수 있는 인플레이션에는 관심이 없다. 뉴딜정책은 여론의 환심을 사려는 것이지 위기에서 벗어나려는 노력과는 관련이 없다. 모든 뉴딜정책은 위험하다. 미래의 재정적자와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수 있다. 지금까지 미국과 유럽 정부의 시장 개입은 대체로 적절한 선에서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크루그먼의 제안을 더 밀고 나가면 아주 위험한 일이 발생할 수 있다. 1930년대처럼 위기를 더욱 연장시킬 수 있다.”
―세계 경제가 침체에서 공황으로 악화될 가능성도 있는가.
“지금으로선 공황의 위험은 없다고 본다. 수치로 본다면 신흥국은 성장률이 낮아지긴 했지만 1∼4%로 여전히 성장하고 있다. 1930년대 미국의 공황과 지금의 상황을 같은 선상에 놓고 볼 수 없다. 우리는 지금 저성장에 있을 뿐이다. 그러나 정부가 너무 개입하면 위험해진다. 정부가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려 하고 지출을 늘려 더 많은 재정적자를 내면 인플레이션을 부채질하고 투자를 멈추게 할 수 있다.”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 당선인이 보호무역주의로 돌아설 것인가.
“아니라고 본다. 선거 유세 동안 그의 도발적인 경제정책은 정말 좋지 않게 보였다. 그는 한국이나 콜롬비아와의 자유무역협정(FTA)에도 반대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그의 도발은 유권자의 표를 얻는 것과 관련되었던 것 같다. 그는 당선된 뒤에 훨씬 실용적이고 신중해졌다. 각료도 빌 클린턴과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에서 일한 사람을 많이 데려왔다. 그의 진용을 보고 안심하고 있다.”
이때 소르망은 주머니에서 블랙베리(e메일이 가능한 휴대전화)를 꺼내더니 이게 어느 나라 제품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기자는 블랙베리는 잘 알고 있었지만 어느 나라 제품인지는 몰라 순간 당황했다.
“모르는 게 당연하다. 블랙베리가 어느 나라 생산품인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제품은 40개 나라에서 만들었다. 회사는 캐나다이지만 디자인은 미국에서 했다. 칩은 대만에서, 또 다른 부품은 한국 중국 프랑스 등에서 만들었다. 이제 한 나라에서 만드는 것은 어느 것도 없다. 보호주의는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 그러나 현실에서 모든 경제는 서로 연결돼 있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요구하는 신 브레턴우즈 체제는 필요한가.
“옛 브레턴우즈 체제는 여전히 잘 작동하고 있다. 아시다시피 브레턴우즈 체제는 보호무역을 끝내고 자유무역의 시대를 열었다. 사르코지 대통령이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브레턴우즈 체제에서 미국 달러가 지배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달러의 지배는 협상의 결과로 된 것이 아니라 시장이 결정한 것이다. 브레턴우즈에서 모인 사람들이 달러의 지배를 결정하지 않았다. 시장이 달러를 갖는 것이 안전하다고 믿고 그것을 원했을 뿐이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신 브레턴우즈 체제를 만들어 달러의 지배를 멈출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잘못된 생각이다. 유로는 시장이 작고 역사도 짧아 아직 달러에 비해 경쟁력을 갖고 있지 않다. 경쟁력 있는 유로는 20년 후에나 가능하다. 유로를 채택하는 것은 협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이 결정하는 것이다. 분명 우리는 국제금융을 규제할 수 있는 새로운 체제가 필요하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와 자산유동화는 한때 금융의 혁신이라고도 불렸다. 왜 실패했는가.
“서브프라임 모기지는 프라임 모기지(우량 주택담보대출)에 접근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에게까지 대출의 길을 연 혁신적인 금융기법이었다. 자산유동화에도 비슷한 말을 할 수 있다. 중국이나 인도 같은 가난한 나라는 투자를 위한 돈을 모을 수 없었다. 아무도 위험한 중국이나 인도에 투자하려 하지 않았고 중국과 인도 내에 자본 축적도 없었다. 자산유동화는 이들 나라의 성장을 가능케 한 엔진이었다. 그러나 효율적인 혁신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추진됐을 때 문제가 발생한다. 이를 새로 개발된 약에 비교하고 싶다. 새 약은 병을 고칠 수 있다. 그러나 약에는 늘 부작용이 따른다. 약사는 설명을 하고 약을 팔아야 한다. 약이 설명 없이 팔렸을 때 문제가 발생한다. 그렇다고 약이 나쁘다고 해서는 안 된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나 증권화도 마찬가지다.”
―앞으로 미국의 힘이 약화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소망과 현실을 구별해야 한다. 분명 미국은 과거보다 덜 강력하지만 왜 미국이 경제적으로 한 세기 이상 세계를 주도했는가 생각해봐야 한다. 어느 나라에도 미국에서와 같은 연구개발과 마케팅의 결합에 비견할 만한 것이 없다. 미국에는 세계 최고 수준의 대학이 있고 대학에서의 혁신을 기업으로 연결하는 길이 잘 열려 있다. 이것이 성장의 엔진이다. 특허는 미국에서 절반 이상이 나오고 유럽과 일본에서 각각 20%, 한국에서 5%가 나온다. 중국 인도 브라질 러시아에서 나오는 특허는 극히 적다. 이것이 앞으로도 30년 동안 세계의 중심이 어디에 있을지 미리 보여주는 것이다.”
―주요 8개국(G8)을 대체할 G14가 논의되고 있다. 한국이 G14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고 보는가.
“못 들어갈 이유가 전혀 없다. 들어가지 못한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못 들어간다면 그건 한국의 외교 역량이 부족한 탓이다. 특허 같은 혁신의 척도를 보면 한국이 중국과 인도를 앞서는데 사람들은 중국과 인도가 한국을 앞선다고 본다. 한국이 국가 이미지를 잘 관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주요 20개국(G20) 회담에서 스페인은 제외될 뻔했고 스위스는 빠졌다. 그러나 스페인은 세계 8대 경제국이고 스위스는 유럽에서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국가다. 그런 스페인과 스위스가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국가의 외교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파리=송평인 특파원 pisong@donga.com
■기 소르망은 누구
한국 국가브랜드委 출범 조언‘프랑스의 지성’
‘프랑스의 지성’으로 통하는 세계적 석학 기 소르망(65)은 파리정치학교와 동양어전문학교(일본어 전공)에서 동시 수학한 뒤 1966년 국립행정학교(ENA)에 진학했다. 1970∼2000년 파리정치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중국 베이징대, 러시아 모스크바대, 미국 스탠퍼드대와 후버 연구소, 칠레 산티아고대 등 세계 각국에 초빙돼 강의했다. 르몽드, 월스트리트저널, 아사히신문 등 세계적 언론의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고 지금도 르피가로에 글을 싣고 있다. 지난해부터 빌 게이츠 전 마이크로소프트 회장, 클라우스 슈밥 세계경제포럼(WEF) 회장 등과 함께 이명박 대통령의 국제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작년 출범한 ‘국가브랜드위원회’는 그의 조언에 따라 만들어졌다. ‘경제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중국이라는 거짓말’ ‘Made in USA’ 등의 저서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