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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8월 14일 02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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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러시아는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남의 나라에 손을 벌리는 유럽의 ‘병자(病者)’였다.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체제 전환은 했지만 대다수 국민과 기업은 만성적 인플레이션과 빈곤에 허덕였다. 정부의 실정을 틈타 의회를 다시 장악한 공산당과 야당은 사사건건 정부 개혁을 가로막았다.
1990년대 초 체코 헝가리 등 동구권 체제 전환을 경험했던 전문가들도 “러시아의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 예상하기 힘들다”고 실토했었다.
특히 1998년 8월 17일은 신생 자본주의 국가였던 러시아의 위기가 정점에 이른 날이었다. 당시 러시아 정부는 대외 부채상환을 90일간 유예한다고 발표했다. 모라토리엄 사태였다.
모스크바 시민들은 당시 정부 발표와 루블화 폭락 소식을 듣고 달러를 구하러 길거리를 뛰어다녔다. 당시 파산 직전에 몰렸던 스베르은행 같은 대형 은행들은 예금을 인출하러 온 고객에게 이자를 주지 않고 현금 보관료를 받았다.
그때부터 넉 달 뒤 루블화 가치는 달러당 20루블로 모라토리엄 이전에 비해 3배 이상 평가 절하됐다. 러시아인의 월평균소득이 160달러에서 50달러로 줄어든 것이다. 달러를 은행 대신 집 안에 보관하는 습관도 이때 굳어졌다.
모라토리엄 사태 10년을 맞은 지금 러시아는 급성장 페달로 과거의 그늘을 지워버릴 기세다.
요즘 러시아 관료들 사이에 석유수출 기업에 대한 감세 정책이 화두다. 올해 유가가 예상치(배럴당 80달러)를 훨씬 웃돌아 세금을 깎아줘도 된다는 얘기다. 올해 정부가 석유 수출로 벌어들일 예산은 1780억 달러로 지난해보다 330억 달러 이상이 늘 것으로 전망된다.
지금 모스크바 시내와 외곽의 도로 대부분은 새로 포장되고 있다. 앞으로 3년간 도로 항만 공항 등 사회간접자본에 750억 달러를 쓰겠다는 계획이다. 모스크바 시내에서 만난 한 시민은 “정부가 베이징 올림픽 응원단의 비행기표 값과 숙식비 대부분을 대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모라토리엄 당시 근로자의 10%를 해고했던 러시아 1위 가스 수출기업 가스프롬은 세계 기업 1위를 노리고 있다.
많은 서방 경제 전문가는 러시아가 지난 10년간 국제유가 상승 덕에 급성장했다고 분석한다. 실제로 국제유가가 러시아 모라토리엄 당시에 비해 10배 이상 올랐고, 수출의 70%가량을 원유와 석유 관련 제품에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2000년 블라디미르 푸틴 전 대통령(현 총리) 집권 이후 국내 정치가 안정을 유지하고 있는 데다 자본과 노동을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있기 때문에 성장에 속도가 붙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최근 모스크바를 방문한 외국 기업인들도 “러시아의 성장 속도가 너무 빨라 당황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라고 입을 모았다.
모스크바 생활 4년째인 기자도 지난주 현금카드 유효기간을 연장하기 위해 은행에 들렀다가 이런 변화를 실감했다. 창구 직원은 15분 만에 카드를 재발급해줬다. 지난해까지는 2주가 넘게 걸린 일이 1년 만에 이처럼 변한 것이다. “불편한 점이 있으면 전화해 달라”고 말하는 직원의 표정도 러시아인답지 않았다.
세계 유력 기업들이 자원개발 과정 중에 러시아에서 면허권을 빼앗기는 것도 이런 고속 성장 흐름을 간과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자원외교를 외치는 한국 정부나 시장 개척에 나선 기업들은 10년 전 말버러 담배 한 갑으로 문제를 해결하던 자세를 버리고 러시아의 변화 속도를 냉철하게 읽어야 할 시점이다.
정위용 모스크바 특파원 viyonz@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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