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시행착오]<하>52층 아파트…‘도쿄만 르네상스’

  • 입력 2007년 7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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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東京) 만 일대 매립공사에 따라 1930년대 지도에 등장한 인공 섬 도요스(豊洲). 1990년대 초반까지도 조선소, 화력발전소, 가스공장, 석탄하역부두, 제당공장 등이 있던 공장지대였다. 화력발전소를 비롯한 많은 시설이 문을 닫은 뒤에도 조선소는 2002년까지 가동했다. 일본에서 가장 비싼 상업지인 긴자(銀座)에서 자동차로 5∼10분 거리지만 일반 시민들의 발길은 좀처럼 닿지 않았다. 잡초가 우거진 채 버려진 땅도 많았다. 공장에 다니는 근로자들을 제외하면 이곳에 집을 구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2001년 균형발전의 올가미에서 도쿄를 풀어 준 이후 도요스는 ‘르네상스’를 맞은 듯 눈부시게 변신하고 있다.》

○ 일자리 1800→3만3000개

도심에서 인공 섬인 가치도키(勝 どき)와 하루미(晴海)를 거쳐 도요스에 들어서면 한창 공사 중인 52층과 32층짜리 건물이 눈길을 붙든다.

내년 초 완공 예정인 두 건물은 1481가구를 수용할 수 있는 고층 아파트. 가장 비싼 가구의 분양가는 2억5000만 엔(약 20억 원)에 이른다.

공사장을 지나면 지난해 10월 문을 연 5층짜리 복합 상업시설 ‘어번 독 라라포트 도요스’가 모습을 드러낸다. 점포 200여 개가 들어선 이곳에는 어린이의 직업체험 테마파크인 ‘키자니아’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지방과 외국에서까지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라라포트 측은 개장 1년이 되는 올해 10월까지 1300만 명이 이곳을 찾아 350억 엔(약 2800억 원)을 쓰고 갈 것으로 추산한다.

2002년까지 IHI 조선소가 들어서 있던 이 일대(도요스 2, 3정목·町目)에는 지난해 IHI 본사와 시바우라(芝浦)공대 등도 이사해 왔다. 3번지에는 올해 4월 초등학교도 문을 열었다. 도요스가 속한 고토(江東) 구에 초등학교가 신설된 것은 26년 만의 일이다. 1980년대 출산율 저하와 도심 공동화(空洞化)가 진행됐기 때문.

도쿄 도는 2, 3정목의 재개발사업이 내년에 대부분 끝나면 3만3000명이 이곳에 일터를 두고 2만2000명이 거주하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 2002년 이곳에서 일하던 IHI 조선소의 근로자는 1800명. 지난해 1월 1일 현재 주민 수는 123명에 불과했다.

○ 고층 아파트 벨트로 변신하는 도쿄 만

‘일본인들은 지진 때문에 고층 건물을 싫어하고 아파트보다는 단독주택을 훨씬 선호한다.’

3년 전까지만 해도 이 같은 상식이 통했다. 1980년대 후반 거품경기 때 도쿄에는 고층 아파트 건축 붐이 일었지만 2004년까지 50층이 넘는 고층 아파트는 다섯 손가락 이내였다.

이제는 하네다(羽田) 공항에서 도심 쪽으로 리무진 버스를 타고 가면서 볼 수 있는 것만 5개가 넘는다.

공장과 창고 지대였던 도쿄 만 연안이 고층 아파트 단지로 변했음을 실감케 한 일화 중 하나가 도쿄도영 지하철의 재정(財政)이다. 도쿄신문에 따르면 개업 후 48년 동안 적자를 내 온 도쿄도영 지하철은 지난해 처음으로 흑자를 냈다.

흑자를 낸 일등공신은 도쿄 만 연안을 지나는 오에도(大江戶) 선. 2000년 개통할 때만 해도 승객 부족으로 재정난을 겪을 것이라고 예상됐지만 도쿄 만 연안 일대 개발 붐을 타고 이용 승객이 급증하는 추세다.

○ 동진(東進)하는 일본의 배꼽

올 3월 미나토(港) 구에 미드타운타워(54층), 지요다(千代田) 구에 신마루노우치빌딩(38층)이 문을 여는 등 사무용 빌딩의 고층화도 빠르게 진전되고 있다.

이 고층 빌딩들의 등장은 도쿄의 랜드마크(이정표)와 관광 동선은 물론 주말 나들이 패턴까지 바꿔 놓았다. 올해 어린이날을 낀 황금연휴 기간(4월 28일∼5월 6일) 중 미드타운타워와 신마루노우치빌딩을 찾은 방문객은 각각 150만 명과 122만 명에 달했다.

2003년 문을 연 미나토 구의 롯폰기힐스모리타워는 ‘힐스 족’이라는 신조어를 낳으며 새로운 문화 현상으로까지 자리 잡았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도쿄 도심으로 인구가 몰리면서 도심 공동화는 사어(死語)가 된 지 오래다.

일본의 ‘배꼽’도 도쿄 쪽을 향해 이동하는 추세다. 배꼽이란 일본 국민의 몸무게가 똑같다고 가정했을 때 무게중심에 해당하는 곳. 기후(岐阜) 현 세키(關) 시에 일본의 배꼽을 나타내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그러나 2000년 이후 5년간 배꼽이 도쿄 쪽을 향해 2.1km 이동하는 바람에 엉뚱한 곳에 기념비가 서 있는 꼴이 됐다.

○ 15년 악몽에서 탈출

도쿄 도심의 부활은 3차 산업의 고용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나타났다. 재개발과 인구 증가로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도쿄의 실업률은 1997년 4.1%에서 2002년 5.6%까지 상승했으나 지난해에는 4.2%로 떨어졌다. 취업 인구도 2003년 638만 명에서 지난해 655만 명으로 17만 명 늘었다. 고용 증대가 3차 산업을 중심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은 같은 기간 제조업 취업 인구가 85만 명에서 84만 명으로 1만 명 줄어든 데서 확인된다.

서비스 수요가 살아나면서 도쿄에 있는 주요 백화점과 호텔 등은 너도나도 거액을 쏟아 부어 대대적인 새 단장 공사에 나서고 있다.

도심 부활이 일본 경제에 가장 크게 기여한 바는 15년 동안 지속된 땅값 디플레이션(가격이 지속적으로 떨어지는 현상)에 제동을 건 점이라고 전문가들은 설명한다.

부동산 등 자산 가격 하락이 수요를 감소시키고, 수요 감소는 기업 실적을 악화시켜 실업을 낳고, 실업이 다시 구매력을 떨어뜨리는 악순환 고리를 끊었다는 것이다.

도쿄=천광암 특파원 iam@donga.com

■ 日 유명 건축가 오에 ‘도쿄 집중개발론’

“세계를 향해 일본의 매력을 호소하려면 도쿄를 발전시켜야 합니다. 공공사업을 할 돈이 있으면 도쿄에 집중 투자하자는 거죠.”

이 같은 주장을 앞장서 펼쳐 온 일본의 유명 건축가 오에 다다스(大江匡·53·사진) 플랜텍어소시에이츠 대표를 5일 도쿄 시내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오에 대표는 소니 본사, 닛산자동차 디자인센터, 산토리 상품개발센터 등을 설계했다. 1986년 ‘도쿄건축상’을 시작으로 20여 개의 상을 받았다.

―도쿄를 집중 개발하면 지역 격차가 확대될 것이라는 주장이 많은데….

“공공사업을 벌여 지역 재생에 성공한 지방자치단체는 5% 정도에 불과하다. 95%는 유바리(夕張) 시의 파산 사례에서 보듯 실패했다. 도쿄는 일본 경제 전체를 이끌어가는 견인차다. 도쿄가 발전하지 않으면 지방의 경제까지 어려워진다.”

―일본 정부가 규제를 풀어 도쿄의 사무용빌딩과 아파트 고층화를 유도하는 것은 바람직한가.

“그렇다. 좁은 땅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려면 집중이 해법이다.”

―도심에 인구가 몰리면 환경과 교육 등 많은 면에서 부작용이 발생한다는 지적도 있다.

“환경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은 집중이 아니라 ‘스프롤’(sprawl·교외가 무질서하게 확대되는 현상)이다. 중핵(中核)도시에 인구와 자원을 집중시키고 나머지 지역에는 녹음을 많이 남겨두는 것이 환경에 좋다. 교육 측면에서도 그동안 출산율이 떨어지면서 도심 교실이 텅텅 비어 문제였다. 이제 도심으로 인구가 회귀하면서 교육이 정상화되고 있지 않은가.”

―일본의 수도 기능 이전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일본의 국토가 미국처럼 넓다면 생각해 볼 만한 일이다. 그렇지만 일본의 면적(38만 km²)은 미국 캘리포니아 주(41만 km²)와 비슷한 정도다.”

―한국은 행정중심복합도시를 지어 수도의 기능 일부를 이전할 계획이다. 어떻게 평가하나.

“한국의 국토 면적은 일본의 3분의 1정도 아닌가.(실제로는 남한이 약 10만 km²) 미래를 생각한 결정인지 의심스럽다. 외국인이 아는 한국의 도시래봤자 보통은 서울과 제주 정도다. 한국을 발전시키려면 서울은 외국 기업을 편하게, 제주는 관광객을 편하게 해 주는 도시로 키워야 한다.”

도쿄=천광암 특파원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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