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파트 뇌사]테러와 평화 양극단 오간 ‘Mr. 팔레스타인’

  • 입력 2004년 11월 5일 18시 20분


‘미스터 팔레스타인(Mr. Palestine).’

프랑스 파리 근교의 한 병원에서 생명이 꺼져가고 있는 ‘중동의 풍운아’ 야세르 아라파트는 “나는 팔레스타인과 결혼했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그는 일찍부터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아픔을 꿰뚫어 보는 눈과, 몸을 던진 독립운동으로 팔레스타인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독립에 바친 그의 일생은 그 자체가 팔레스타인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젊은 시절에는 목표 달성을 위해 민간인에 대한 테러도 서슴지 않는 등 양면적인 모습도 보였다.

1929년 8월 4일 이집트 카이로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아라파트는 어려서부터 시 읊기를 좋아했다. 현란한 말솜씨로 또래를 휘어잡았다.

카이로대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하던 시절 그는 ‘팔레스타인 학생연합’에 가입해 4년간 의장직을 맡으며 저항운동의 의미를 깨닫는다. 나이 서른이 되면서 투쟁의 색깔은 분명해진다.

1958년 아라파트는 쿠웨이트에서 대(對)이스라엘 투쟁단체인 ‘알 파타’를 창설해 팔레스타인 해방투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알 파타는 가자지구 등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무력공격을 주도했다. 알 파타는 이후 그의 평생에 걸친 정치적 기반이자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의 중추세력이 됐다.

1969년에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으로 선출되면서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는다. 그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유엔의 구호물자를 타기 위해 줄을 서 있는 한 세계는 팔레스타인에 존경심을 갖지 않는다”며 난민대책에 치우쳤던 PLO를 무장투쟁조직으로 재편했다.

이후 아라파트는 항공기 납치, 뮌헨 올림픽 대학살, 자살특공대 차량폭탄테러 등을 주도하는 테러리스트로 악명을 떨쳤다. 특히 그가 이끄는 ‘알 아크사 순교자 여단’은 1972년 뮌헨 올림픽 기간에 이스라엘 선수와 코치 11명을 살해해 세계를 경악케 했다.

결과는 그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이스라엘의 거센 반격으로 그는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튀니지 등지를 떠도는 도망자 신세가 됐다. 그러나 체포 위기 때마다 뛰어난 변장술로 빠져나가 ‘사막의 불사조’, ‘9개의 목숨을 가진 고양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무력투쟁과 평화협상을 병행하기 시작했다. 이어 1988년 12월 무장투쟁 포기를 선언해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인정하면서 미국과의 대화 창구를 텄다.

평화 무드에 사랑이 필요했을까. 그는 61세 때인 1990년 결혼식을 올렸다. 상대는 자신의 비서이자 경제보좌관이었던 34세 연하의 수하 알타윌. 이 결혼은 2년이 지나서야 세상에 알려졌다.

팔레스타인의 긴장이 완화되면서 1994년 그는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함께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이듬해 라빈 총리가 이스라엘 극우단체 회원에게 암살되면서 평화 무드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아라파트의 말년은 그리 아름답지 않았다.

2001년 12월부터 이스라엘에 의해 가택연금을 당해 사실상 감옥에 갇힌 듯 생활했다. 팔레스타인 국민은 집에 갇힌 종이호랑이보다 대이스라엘 투쟁을 이끄는 저항단체 ‘하마스’를 더 많이 응원하기 시작했다.

전제적 조직운영과 부정부패로 지탄도 받았다. 내부 반발이 잇따라 지난해 4월 총리로 임명한 마무드 아바스는 취임 4개월 만에 사퇴했고, 후임자인 아메드 쿠레이 총리도 개혁을 요구하며 그와 마찰을 빚었다.

1980년대 초반 마약밀매로 50억달러(약 5조6000억원)의 비자금을 만들었다는 소문이 흘러나왔다. 쓰고 남은 돈 10억달러(약 1조1200억원)를 이용해 권력을 유지한다는 비아냥도 들었다. 부인 알타윌 여사의 호화스러운 파리 생활도 비판의 대상이었다.

박형준기자 love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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