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어진 상처 너머로 지구의 속살을 보여주는 듯한 그랜드 캐니언의 위용. 기나긴 세월이 빚어낸 자연의 위대함은 인간의 교만함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 말없이 웅변한다. 사진제공 함길수씨
뼈를 드러낸 협곡의 암석, 살과 같은 붉은 흙을 보고 있노라면 태곳적 지구가 만들어지던 때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그려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서부극의 메카 투손
그랜드 캐니언의 플래그 스태프에서 남쪽으로 15번 주도를 타고 내려오면 겨울 휴양도시 피닉스를 만나게 된다. 일찍이 협곡과 사막, 신비한 대자연으로 그득했던 이곳은 과거 인디언의 땅이었다.
어린시절, 서부영화에서 본 멋진 사나이들의 격투장면이나 거대한 선인장과 함께 노을 진 석양 너머로 말을 타고 바람처럼 떠나던 주인공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바로 로키의 마지막 자락이다.
애리조나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투손에서 사막의 박물관이라 일컫는 사구로 내셔널 기념관으로 향하는 길을 한 시간쯤 달리자 사람 키를 두 배나 훌쩍 넘는 선인장 숲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숲은 산자락이 펼쳐진 언덕 위까지 끝없이 이어졌다. 선인장 군락은 사막의 신비로움을 더해준다. 코요테, 비버, 뱀, 재규어 등 흔히 볼 수 없던 많은 동식물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그 중 눈길을 끈 것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 허밍버드. 날개를 파르르 떨며 꽃에서 꿀을 빨아먹는 모습도 신기하지만 정지 상태로 하늘에 오래도록 멈추어 서있는 날갯짓은 묘기에 가까웠다.
애리조나 카우보이의 서부극 촬영장소였던 ‘올드 투손’에 도착했다. 60, 70년대 서부극 전성시대를 구가하던 당시의 영화촬영 세트가 그대로 남아 있다. 입구에 들어서자 영화에서 보았던 서부 거리와 은행, 보안관 사무실, 주점, 감옥 등 낯익은 풍경이 정겹다. 이 곳에서는 매 시간 60∼90년대에 이르는 다양한 추억의 영화들을 상영하고 있다.

○바로크 식 문화도시 사카테카스
투손을 마지막으로 미국을 넘어 멕시코로 향했다. 거대하고 변화무쌍한 멕시코 북부의 웅장한 기상이 다시금 탐험대를 긴장 속으로 밀어 넣는다.
북부도시 치와와를 지나 멕시코 식민 시대의 중심도시 사카테카스로 향했다.
불모의 땅과 같았던 이 곳에서 과거 스페인 모험가들은 은광맥을 찾아냈고 비옥한 평원의 바로크식 문화도시로 탈바꿈시켰다. 아즈텍 제국의 멸망 이후에는 스페인 왕가의 중요한 금, 은 공급지였던 3개 도시-사카테카스, 과나후아토, 산루이스포토시-중 하나가 됐다.
은 생산량이 전국의 3분의 2를 차지해 이 도시에서 250km 남동쪽에 있는 과나후아토와 멕시코시티로 연결되는 길은 ‘은의 길’이라 불렸을 정도.
도시는 스페인의 영향을 많이 받아 수도원과 교회, 궁전, 광장 등 화려한 스페인 스타일로 이루어져 있다. 거리는 스페인식 전통에 멕시코의 현란한 색조들이 가세해 강인하고 역동적인 인상을 갖게 됐다. 19세기 초반 이 지역에서 최초의 무장 봉기와 반란이 시작되면서 스페인 통치에 대한 종식을 고했고 이후에는 다시 ‘독립의 요람’이 됐다. 사카테카스는 이제 비옥한 농경문화와 잘 보존된 식민시대의 문화유산으로 전 세계 관광객을 유치하는 관광산업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해발 2500m에 위치한 이 도시에는 대성당을 중심으로 한 역사지구가 있는데 장엄한 바로크양식의 건물들이 즐비하다. 오래된 돌길과 분수가 있는 작은 광장들과 교회 등에서는 중세 유럽의 분위기가 그대로 넘쳐났다.
함길수 여행칼럼니스트 ham91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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