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공화국 수비대원 인터뷰

  • 입력 2003년 4월 18일 16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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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다드에서는 러시아제 칼리니쉬코프 소총이 불티나게 암거래되고 있다. 시내 곳곳의 공화국 수비대 무기고가 털렸기 때문이다.

전쟁 전 이 총은 120달러였지만 10일 경 3달러까지 떨어졌다. 그러나 약탈이 시작되자 재산 가진 시민들이 너도나도 총을 찾으면서 18일에는 33달러까지 치솟았다.

개전 후 탈영한 공화국 수비대원 칼리프 파룩(28· 사진). 그의 집 거실에는 소총과 탄창이 수북했다. 탄알만 모두 3000발. 바그다드가 위험해진 것은 후세인 잔당의 저항도 남아있지만 민간인이 쉽게 총을 쥐게 된 것도 중요한 원인이다. 취재진은 이라크 최정예라는 공화국 수비대의 실체를 파룩을 통해 알아보기로 했다.

그는 2000년까지 바드다드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교수와 다툰 뒤 졸업을 못하는 바람에 중등학교 졸업자 신분이 돼 2002년부터 2년 복무 예정으로 입대했다. 이라크는 학력이 높을수록 의무 복무 기간을 줄어들어 박사의 경우 45일만 근무하면 된다.

▼공화국 수비대의 용맹은 어느 정도인가

"초록색 휘장을 두른 수비대가 최강이다. 박격포를 한팔에 싸안고 포탄을 끼워넣는 병사도 있을 정도다. 정규군보다 2배 훈련을 받지만 대우가 좋다. 하지만 전쟁 전엔 월급이 자주 나오지 않았다."

▼당신 군복에는 빨간색 휘장이 둘러져 있다. 군 생활은 어땠나?

"고통스러웠다. 새벽 5시반에 기상해 점호를 받았다. 철저하게 검사받고 하나라도 못 챙기면 얼차례를 받았다. 턱수염이 조금이라도 자라면 사포(砂布)로 문질러 버렸다. 체력 훈련이라며 가로 세로 2m 짜리 참호를 파게 했다. 다 파고나면 다른 장교가 다시 덮으라고 말했다. 음식은 형편 없었다. 25명이 닭고기 한 마리를 나눠먹은 적도 있다."

▼전쟁 당시 상황을 설명해달라.

"내 부대는 쿠트에 주둔했지만 지뢰제거반인 나는 바그다드에 파견됐다. 개전후 1주일 뒤쯤 복귀 명령이 떨어졌다. 고심 끝에 탈영했다."

▼왜 그랬나.

"아프가니스탄에 가본 적이 있는가. 그곳 군인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다. '더 나은 미래'라는 명분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명분이 없었다. 후세인이 지면 우리는 더 풍부한 음식과 급료를 받을 수도 있다. 미군에 구식 무기로 맞서 목숨을 버릴 이유가 없다."

▼다른 병사들도 당신과 비슷한 생각이었나

"같은 부대의 내 친구는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는 쿠트에서 미군 탱크 50대를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아 대전차포를 쏘았는데 미군 탱크가 끄떡없었다. 두 번째 대전차포를 캐터필라에 명중시켰는 데도 멀쩡해 지휘관을 찾았더니 이미 전사했다고 한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도망가는 것 뿐이었다."

▼미군을 지지하는가

"그렇지 않다. 미군은 어쨌거나 침략군이다. 기회만 생기면 미군을 죽일 것이다. 다른 이라크 인들의 생각도 마찬가지다."

박래정특파원(팀장·국제부)

김성규특파원(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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