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민족주의… 애국심 과열…축구장에선 괜찮다?

  • 입력 2002년 6월 19일 18시 52분


대처 전 총리
대처 전 총리
‘유럽에서 축구는 민족주의(nationalism)를 용인할 수 있는 마지막 형식.’

영국에서는 국기인 유니언 잭을 흔드는 것은 극우적인 행동으로 비쳐진다. 유니언 잭은 과거 제국주의시대 인종주의와 식민주의의 상징. 토니 블레어 총리가 97년 총리 집무실이 있는 다우닝가로 첫 출근하는 길에 유니언 잭을 든 지지자들과 함께 거리를 행진했다가 호된 비판을 받은 것도 그 때문이다.

미국의 인터넷 잡지 슬레이트닷컴은 20일 “그러나 축구장에서만은 이 모든 게 용인된다”고 보도했다. 7일 월드컵 경기에서 아르헨티나와 잉글랜드가 맞붙었을 때 “당신네 해군은 어디 있느냐”는 구호를 외친 것은 비단 훌리건만이 아니었다. 82년 포클랜드전 당시 영국이 아르헨티나 해군을 격파한 것을 상기시키는 이 구호는 축구장 밖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국가주의적 표현으로 간주된다.

마거릿 대처 영국 전 총리는 총리 재임시 축구경기에서 독일이 영국을 이겼다는 말을 듣고 “그들이 ‘우리의 게임’에서 우리를 이겼는지 모르지만 20세기 들어와 ‘그들의 게임’에서 우리는 두 번이나 이겼다”고 말했다고 슬레이트닷컴은 전했다. 영국이 축구의 종가이고 1,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을 이겼다는 국가적 자부심이 담긴 발언. 그러나 이 발언으로 독일인들이 격노했다는 보도는 없었다. 웃고 넘어갔다.

나치즘의 홍역을 치르면서 국호를 부르는 것 자체를 금기시하고 있는 독일인들도 축구장에서만은 ‘도이칠란트!’ ‘도이칠란트!’라고 외친다.

축구는 마르크화와 함께 전후 독일 부흥의 상징. 지난해 말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독일이 잉글랜드에 1-5로 대패하자 진보성향의 일간지 프랑크푸르티 알게마이네의 한 칼럼니스트는 “전후 독일의 부흥을 상징한 두 가지 모두 사라지게 됐다”고 애석해 했다. 마르크화는 유로화의 통용과 함께 사라졌다.

독일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는 총선을 앞둔 빡빡한 일정에서도 자국팀의 월드컵 경기만은 빠짐없이 시청하고 있다. 90년 월드컵에서 독일이 우승한 뒤 헬무트 콜 총리가 연임에 성공한 점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고 이 잡지는 전했다.

축구가 애국심이나 민족주의를 발산시킬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배출구가 되고 있는 이유에 대해 영국의 주간지 이코노미스트(1일자)는 “유럽국가들이 유럽연합(EU)을 통해 하나의 유럽을 지향하기 위해 애국심이나 민족주의의 발흥을 억누르고 있어 다른 곳에서는 표출하기 어렵기 때문”으로 분석했다.

축구가 민족주의나 애국심을 고취시킬 수 있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미국이 못하는 거의 유일한 스포츠이기 때문. 슬레이트닷컴은 “만약 미국이 올림픽에서처럼 축구에서도 압도적 우위를 보인다면 세계 각국의 민족주의는 반미 감정으로 전화될 우려가 있다”고 전망했다. 이 잡지는 “미국은 유럽과는 달리 애국심을 고취할 수 있는 기회가 널려 있다”면서 이번 월드컵에서 미국이 더 이상 이기지 않기를 희망했다.

홍은택기자 euntack@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