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모리 日서 사임발표…페루정국 혼란

  • 입력 2000년 11월 20일 18시 33분


군색한 집권연장책으로 끈질기게 활로를 모색해온 후지모리 페루 대통령(62)이 결국 막다른 골목까지 가서야 권력을 놓는 선택을 함으로써 페루는 또다시 불안한 정정 혼미 상태로 접어들었다.

부정선거와 부패스캔들로 10년 독재 아성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는 후지모리 대통령은 브루나이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이후 은신해온 일본 도쿄에서 19일 성명을 통해 ‘48시간 내 사임’의사를 밝히고 사직서를 곧 의회에 제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성명이 발표된 직후 페루 내각은 “외국에서 이 같은 발표를 한 것에 대해 분개하지 않을 수 없다”며 “항의의 뜻으로 내각 총사퇴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각료들은 “과도내각이 구성되고 정치적으로 안정될 때까지 현재의 임무를 계속하겠다”고 덧붙였다.

후지모리 대통령의 사임소식이 전해지자 ‘페루 여성 민주전선’등 야권 단체들은 수도 리마의 대통령궁 앞에서 민주주의 승리를 자축하는 집회를 갖는 등 들뜬 분위기라고 외신이 전했다. 그러나 후안 루이스 시프리아니 리마 대주교는 특별미사를 통해 “페루는 이 순간 분열을 극복하고 화합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며 “국민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좀더 심사숙고해줄 것”을 당부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이베로아메리카 정상회의(17, 18일) 참석차 파나마로 향하려던 계획을 바꿔 일본에서 호텔방에 칩거중인 후지모리 대통령이 페루로 귀국할지 여부가 주목되고 있다.

그가 4월 대통령 3선을 금지한 헌법규정을 바꿔가며 출마해 부정선거시비까지 일으킨 데다 9월 측근인 블라디미로 몬테시노스 국가정보부장이 야당의원 매수 스캔들을 일으켜 민심은 이미 그의 곁을 떠난 상태다. 후지모리 대통령은 내년 4월 대선과 총선을 다시 실시하고 몬테시노스를 제거하는 선에서 정권을 유지하려 했으나 친(親)몬테시노스 군부세력의 반발과 야당의 공세 틈새에서 압박을 받아왔다.

특히 법무부 특별검사가 11월초 몬테시노스의 권력형 부정축재와 인권유린 혐의에 대해 수사를 시작, 후지모리 대통령까지 수사선상에 오를 위험이 커지면서 후지모리 대통령의 망명 가능성이 페루 정가에 확산됐다.

페루 정가에서는 일본 이민 2세인 후지모리 대통령이 본국이 아닌 일본에서 퇴임 발표를 한 것은 그가 이미 정국 통제권을 상실한 상황에서 귀국시 신변안전을 우려한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그의 사임 발표로 일단 새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리카르도 마르케스 제2부통령(프란시스코 투델라 제1부통령은 지난달 사임)이 국정을 이끌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4월 대선 이후 후지모리 하야 시위를 주도해온 야당 지도자 알레한드로 톨레도는 “국회의장(야당)이 과도내각을 구성해야 하며 후지모리 대통령은 사임했다고 해도 사법부 수사에 응해야 한다”고 밝혀 페루 정국의 파란은 계속될 전망이다.

<권기태기자>kkt@donga.com

▼도쿄 호텔체류 후지모리 외부접촉 끊어▼

후지모리 대통령은 17일 이후 일본 도쿄의 뉴오타니호텔에 머물고 있다. 20일 보도관을 통해 “48시간 내에 국회의장에게 사표를 제출할 것”이란 성명만 발표했을 뿐 외부와의 접촉을 일절 끊고 있다.

그는 브루나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차 13일 페루를 떠났으며 17일 일본에 도착했다. 그는 당초 파나마에서 열리는 이베로아메리카 정상회의에 참석할 예정이었으며 갑작스러운 행선지 변경 이유로 재정적자대책을 위해 일본에 특별융자를 요청하려는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후 감기 등으로 건강이 좋지 않다며 도쿄 체류일정을 연장하고 있다. 일본 망명설, 아시아국가 망명 요청설, 귀국설 등이 흘러나오고 있지만 후지모리측은 일절 언급하지 않고 있다.

<도쿄〓이영이특파원>yes20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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