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항소법원 "피노체트 면책특권 박탈"

  • 입력 2000년 6월 6일 21시 11분


칠레의 어두운 과거를 청산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칠레 산티아고 항소법원은 5일 종신 상원의원인 전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면책특권을 박탈한다고 판결했다.

루벤 바예스테로스 항소법원장은 이날 “기소를 앞두고 있는 피노체트 의원에 대한 면책특권 박탈 여부를 (지난달 23일) 법관 22명의 재판부 합의에 부친 결과, 찬성 13, 반대 9로 면책특권을 박탈키로 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피노체트측의 대법원 상고절차가 남아 있긴 하지만 이번 판결로 피노체트는 물론 군정 시절(1973∼90년)을 함께 이끌었던 3000여명의 관계자들까지 각종 인권유린 혐의로 사법처리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AP통신은 피노체트의 변호인단이 항소법원의 판결에 불복, 대법원에 5일 내에 상고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재판 불간섭’ 원칙을 천명해온 칠레 정부가 사법부의 판결을 존중할 것이라는 의사를 여러차례 표명해 대법원 상고 절차는 사실상 ‘통과절차’에 불과할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클라우디오 우에페 내무장관은 판결 직후 성명을 통해 “정당한 사법절차인 만큼 칠레 국민은 법원의 판결과 사법부의 독립을 존중해야 한다”며 지지의사를 표명했다.

판결이 나오자 실종자 유족회장 비비아나 디아스는 “지난 26년간 어둠 속에 묻혀 있던 희생자들의 억울한 사연이 만천하에 드러날 것”이라며 기뻐했다.

미국 국무부는 “칠레 정부는 인권문제들을 심리하는데 있어서 사법당국의 독립성을 보장했다”며 판결을 적극 지지한다고 밝혔다. 국제사면위원회는 “칠레 법원의 판결은 혁신적인 결정”이라며 환영했다.

피노체트는 이날의 면책특권 박탈 판결에 결정적 원인을 제공한 ‘정치범 19명의 납치 및 행방불명 사건’(73년) 외에도 109건에 달하는 각종 인권 유린혐의로 피소돼 있다. 피노체트의 사법처리에 마지막 장애물은 그가 전직대통령으로서 갖고 있는 면책특권이다. 칠레 의회는 3월말 전직 대통령에게 면책특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대법원이 향후 이 문제에 관해 어떤 판단을 내릴 것인지 주목된다. 또한 84세의 고령인 피노체트가 수차례 병원신세를 질 만큼 정신적 육체적으로 쇠약하다는 점이 참작될 경우 예기치 못한 판결이 나올 수도 있다.

<이종훈기자>taylor5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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