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신광영]얌체 환자

  • 동아일보
  • 입력 2026년 4월 5일 23시 18분


서울에 사는 60대 이모 씨는 보건복지부의 ‘의료쇼핑 의심자’ 리스트에 올라 있다. 지난해 1∼10월 열 달간 받은 물리치료 횟수가 547회에 달한다. 월 55회꼴이다. 하루에 병원 6곳을 돌며 목, 허리, 어깨, 발목 치료를 받은 날도 있다. 이것도 한 해 전인 2024년(1159회)과 비교하면 절반으로 줄어든 것이다. 정부는 그해 하반기부터 진료비 본인부담률을 높였다. 매일 출근하듯 병원에 가는 ‘연간 365회 이상’ 이용자에 대해 366회 차 방문부터는 진료비의 90%를 내도록 한 것이다. 그 전엔 횟수 제한 없이 진료비의 20∼30%만 내면 됐다.

▷본인 부담이 커지자 병원 가는 횟수를 줄인 건 이 씨뿐만이 아니다. 연 365회 초과 이용자는 2024년 2285명이던 게 지난해 102명(9월 누적 인원)으로 뚝 떨어졌다. 내 돈 내고는 안 받을 치료를 거의 공짜로 누리는 도덕적 해이가 그만큼 심각했던 것이다. 실손보험이 이런 풍조를 부추겼다. 병원 가는 데 금전적 부담이 없다 보니 건강보험 재정에서 나가는 급여 진료와 실손보험에서 메워주는 비급여 진료가 함께 늘어 왔다.

▷‘연 365회’ 기준선은 없는 것보단 낫지만 큰 효과를 내진 못하고 있다. 그보다 살짝 아래인 1년에 300회 넘게 외래 진료를 받은 환자는 2024년 8400여 명에 달했다. ‘200회 초과’는 6만 명, ‘150회 초과’는 20만 명이 넘는다. 이들의 진료비를 대느라 건보 재정이 줄줄 새고 있다. 결국 정부는 내년 1월부터 기준을 한층 강화하기로 했다. 앞으론 1년에 300번 넘게 병원에 가면 301번째부턴 진료비 90%를 본인이 내야 한다.

▷의료 쇼핑객들이 건보 재정을 축내면 피해자가 생긴다. 정작 써야 할 곳에 돈을 쓰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령화로 ‘간병 파산’ ‘간병 살인’ 같은 비극이 늘고 있는데 이런 가족들의 고통을 덜어줄 간병비 급여화는 계속 밀리게 된다. 중증 희귀질환 치료나 필수 의료 확충에 쓸 재정 여력도 부족해진다. 더구나 청년 인구 감소로 이들이 짊어질 보험료 부담은 커지고 있다. 지금처럼 일부가 혜택을 독식하면 건강보험제도에 대한 젊은 세대의 불신이 깊어질 수 있다.

▷이참에 기준을 더 강화해 진료 횟수가 연 200회나 100회만 넘어도 본인이 병원비를 부담하게 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소수가 건보 재정을 갉아먹으며 다수의 성실 납부자들에게 박탈감을 주는 상황을 바로잡자는 것이다. 다만 신장병, 당뇨 등 만성질환자들은 병원에 자주 가야만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들의 치료받을 권리가 침해되지 않도록 적정선을 찾을 필요는 있다. 건강보험은 여러 세대가 십시일반으로 채워온 공동의 저수지다. 몰래 물줄기를 빼내거나 물을 오염시키는 얌체 환자들을 골라내야 ‘저수지’가 제 기능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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