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피해로 무너진 삶, 심리치료 덕에 되찾아”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11월 25일 03시 00분


피해자 지원 기관-봉사자 대상
법무부, 인권대회 열어 상 수여
김태자 구미센터 처장 국민포장
이금선-장은진씨 대통령 표창

서울서부스마일센터에 있는 센터 이용자들의 이용 후기 메모. 스마일센터 제공
서울서부스마일센터에 있는 센터 이용자들의 이용 후기 메모. 스마일센터 제공

“불 꺼진 방을 보고 있지 못했거든요. 자꾸 그때 생각이 떠올라서요. 스마일센터에서 1년 동안 심리 치료를 받으면서 최근에는 취업에도 성공했어요.”

살인 유가족 피해자인 김주영(가명·23) 씨는 지난해 6월경 눈앞에서 아버지와 오빠를 잃었다. 이후로 김 씨는 불 꺼진 방을 보고 있으면 사건 당일 집 안에서 벌어졌던 장면이 떠올라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경찰은 법무부가 범죄 피해자 회복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한 스마일센터(범죄 피해 트라우마 통합지원기관)로 김 씨를 안내했다. 김 씨가 정상적으로 생활하는 것조차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에 임시 숙소를 함께 제공하는 스마일센터에서 심리 치료를 받기를 권한 것이다. 김 씨는 24일 통화에서 “사건 발생 직후에는 제정신으로 지내기가 힘들어 다니던 회사도 그만뒀다”며 “1년여간 스마일센터에서 치료받으면서 극적으로 ‘제 삶’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 씨의 1년여간 치료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상담을 받으면서도 사건 당일의 모습이 자주 떠올랐다. 어두운 곳에 가면 더욱 그랬다. 그때마다 스마일센터에서는 외상후 스트레스를 줄여주는 데 효과적이라고 알려진 나비포옹법(두 팔을 교차해 스스로를 껴안은 다음 몸을 토닥이는 포옹법)과 복식호흡법 등을 알려주며 김 씨를 다독였다. 그가 혼자 있을 때도 공황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김 씨는 “어두운 방 안에 혼자 들어가 숨이 가빠질 때면 나비포옹법으로 스스로를 달랬다”며 “또 상담 선생님들의 말처럼 사건 당시와 현재의 나를 분리해서 생각하려고 노력하니 점차 나아질 수 있었다”고 밝혔다.

사건 발생 약 1년 6개월이 지난 지금, 김 씨는 이사 온 경기도에서 최근 새로운 직장에 취업도 성공했다. 김 씨는 자신과 같은 범죄피해자들에게 관련 기관에서 꼭 도움을 받을 것을 추천한다고 말했다. 김 씨는 범죄 피해자들에게 “도움받는 것이 두려워 말라”고 했다. 그는 “범죄 피해를 당한 사람도 결국은 다시 살아가야 하지 않느냐”며 “본인의 삶으로 돌아갈 그 여정을 도와주실 분들이 언제나 계신다는 점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범죄피해자 인권 주간’ 올해 신설

24일부터 30일까지 ‘범죄피해자 인권 주간’을 맞아 동아일보는 범죄 피해자의 회복을 돕는 유관기관 3곳을 대면 및 서면 인터뷰했다. 범죄피해자 인권 주간은 범죄 피해자에 대한 범국민적인 이해와 관심을 높이기 위해 올해 신설됐다. 스마일센터는 법무부가 강력범죄 피해자의 회복을 지원하기 위해 2010년 설립한 범죄 피해 트라우마 통합지원기관이다. 전국 주요 도시에 설립돼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우울증, 불안장애 등 심리적 어려움을 겪는 피해자들을 위해 심리 치료, 법률 상담, 사회적 지원 연계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범죄피해자지원센터와 원스톱센터 역시 범죄 피해자들을 돕기 위해 운영된다.

스마일센터의 총괄지원단장을 맡고 있는 백명재 경희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19일 진행한 인터뷰에서 “범죄 피해자들이 지원을 요청할 수 있는 기관으로부터 즉시 도움받을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이 마련되어야 한다”며 “접근성과 관련한 문제가 해결된다면 더 많은 범죄피해자가 일상으로 빠르게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백 교수는 “한해 약 2만건의 강력범죄 발생 건에 비해 스마일센터에서 매년 신규 등록되는 범죄피해자 수는 1500명으로 전체 건수의 7.5%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백 교수는 이에 대한 원인들로 △범죄피해자들이 지원기관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점 △유관기관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지는 점 △범죄피해자들이 막연한 두려움으로 도움받기를 꺼리는 점 등을 꼽았다.

스마일센터 총괄지원단장인 백명재 경희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가 19일 본보와의 인터뷰에 응하며 질문에 답하고 있다.
스마일센터 총괄지원단장인 백명재 경희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가 19일 본보와의 인터뷰에 응하며 질문에 답하고 있다.

피해자들은 경찰서 등 유관기관에 의해 센터를 소개받아 방문하게 된다. 다만 강제성은 없어 센터를 소개받고도 오지 않는 범죄 피해자들도 적지 않다. 백 교수는 “피해자들이 센터에 오면 자신이 경험한 아픈 이야기를 두 번 세 번 다시 말해야 한다는 두려움에 휩싸이지만, 실제로 센터에서 그렇게 물어보는 경우는 잘 없다”며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상담 선생님들과 심리 치료사들이 단계·수준별에 안정화 치료와 상담을 해주기 때문에, 암과 같은 질병처럼 스마일센터에 치료받으러 오는 것 역시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강조했다.

특히 백 교수는 트라우마 치료의 경우 장기 치료가 필요한 경우가 많으며 약물치료와 함께 심리 치료가 필수적으로 병행되어야 한다고 언급했다. 스마일센터의 경우 법무부 산하 기관으로, 범죄 피해자라면 센터 이용 시 비용이 들지 않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경우에도 부담 없이 오랫동안 이용 가능하다. 센터 건물 일부 층에는 임시숙소도 마련되어 있어 범죄 피해자들이 최대 한 달간 이용 가능하다.

“20년 앓고 있던 우울증 벗어나 일상생활 가능”

30대 이혜지 씨(가명)도 올해부터 스마일센터에서 심리 치료를 받고 있다. 이 씨는 유년기에 동급생 남학생 여러 명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했고 이후 20년 동안 지옥 속에 살았다고 한다. 최근까지도 불면증, 우울증, 대인기피증 등 성범죄 트라우마로 인해 재학 중인 대학원에 정상적으로 나가기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길을 지나다 가해자와 비슷한 인상착의를 마주친다거나,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바닥에 주저앉아 일어나지 못하기도 했다. 이 씨는 “20년 동안 일상생활이 힘들 정도로 수렁에 빠져살았는데, 스마일센터에서 치료받으며 이렇게 좋아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며 “이제는 복용하는 약도 줄여보면서 대학원에서 열심히 공부해 사회복지사의 꿈을 이루고 싶다”고 밝혔다.

스마일센터를 이용한 범죄피해자들의 이용 후기에는 “정말 많은 위로와 도움이 됐다”는 글이 적혀있다. 스마일센터 제공
스마일센터를 이용한 범죄피해자들의 이용 후기에는 “정말 많은 위로와 도움이 됐다”는 글이 적혀있다. 스마일센터 제공

또 다른 성범죄 피해자인 20대 박지우 씨(가명)는 올해 스마일센터의 법률 지원을 받고 대인기피증 증상이 눈에 띄게 호전됐다. 스마일센터에서는 범죄피해자 대신 가해자의 재판을 대신 방청하고 재판 진행 상황을 피해자에게 알려주면서 추가적인 스트레스를 줄여주는 지원을 한다. 부득이하게 피해자가 증인으로 재판정에 직접 나서야 할 경우 △재판 절차 △대기 중 유의사항 △판검사의 역할 등 법정 출석에 대한 예행 연습을 돕기도 한다. 전국 대부분의 범죄 피해자 지원 기관에서도 이 같은 법률지원을 함께하고 있다.

박 씨는 “법정에 가면 모든 사람들이 저에게 손가락질할 것 같은 두려움에 재판에 증언하러 나가기까지 정말 힘들었다”며 “센터에서 도와주겠다기에 재판 절차에 대한 안내사항을 받고 재판정에 나갔더니, 판사도 변호사도 막상 제게 뭐라고 하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전까진 일상에서 카페를 가거나 다른 사람과 눈 마주치는 것도 힘들었지만 이제는 내가 손가락질받고 욕을 들어야 하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많이 나아졌다”며 “법정에 나가도록 용기를 주고 지원해 준 스마일센터 덕분”이라고 말했다.

백 교수는 범죄 피해자들을 스마일센터 밖에서 만나기도 한다. 바로 ‘러닝 모임’이다. 달리기가 우울증 등 심리 치료에 도움된다는 사실은 이미 수차례 과학적으로 입증된 바 있다. 백 교수는 “담당하는 환자들에게 달리기를 추천하고, 이번에는 같이 마라톤도 뛰었다”며 “범죄 피해자들이 혼자 숨어있지 않고 일상으로 나와 사회에서 제 역할을 다하도록 하는 것이 저에게 주어진 임무 아니겠느냐”며 웃었다.

백명재 경희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가 진료를 보는 환자들과 함께 달리기를 마치고 발을 모아 찍은 사진. 백 교수는 환자들에게 정기적으로 달리기를 권한다고 밝혔다.
백명재 경희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가 진료를 보는 환자들과 함께 달리기를 마치고 발을 모아 찍은 사진. 백 교수는 환자들에게 정기적으로 달리기를 권한다고 밝혔다.

범죄피해자지원연합회·원스톱센터 등 전국 60곳 이상

범죄 피해자들을 돕는 기관은 전국에 있는 스마일센터 17곳 이외에도 범죄피해자지원연합회(연합회) 60곳, 서울 동작구에 있는 범죄피해자 원스톱 솔루션 센터(원스톱센터)가 있다.

2006년에 개소해 전국 최대 규모인 연합회는 현재 60개의 범죄피해자 지원센터를 운영 중이다. 연합회는 지자체, 의료기관, 교육청 등과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범죄피해가 발생한 경우 피해자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신속하고 적정하게 지원할 수 있도록 원스톱 시스템을 구축했다. 주요 지원 사업으로는 범죄피해자 상담, 치료비와 생계비학자금 등 경제적 지원이 있다. 특히 2016년부터는 우리나라 범죄피해자 보호·지원 기관 중 유일하게 간병비 지원 사업을 하고 있다.

정성호 법무부 장관은 2022년 국회 형사사법체계 특별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으면서 당시 9개월 동안 위원장직을 수행하고 받은 직책보조비 1000만 원을 “범죄피해자 일상회복에 보탬이 되길 바란다”며 연합회에 직접 찾아가 기부하기도 했다. 2세의 나이에 방임된 여아 사건을 수사한 한 검사는 약 9년 동안 연합회를 통해 해당 아이를 장기적으로 후원하고 있기도 하다.

법무부 현판. 뉴시스
법무부 현판. 뉴시스

원스톱센터는 기존에 분산되어 있던 범죄피해자에 대한 법률·경제·심리·고용·복지·금융 등의 다양한 지원을 한 곳에서 종합적으로 제공하는 기관이다. 범죄피해자의 회복을 위해서는 사건 초기부터 다양한 지원이 필요하나 기존에는 이러한 지원 제도가 여러 주체에 분산되어있어 피해자 입장에서 불편함이 있었다. 이에 법무부는 범죄피해자가 회복을 보다 편리하게 할 수 있도록 피해자 지원 제도들을 유기적으로 연계하고 필요한 지원 등을 한 공간에서 종합적으로 받을 수 있는 원스톱센터를 2024년에 설립했다.

지난해 설립되었지만 벌써 유의미한 실적도 나타내고 있다. 스토킹으로 인해 비자발적으로 퇴사해 실업급여를 받지 못하는 여성 피해자의 사례를 두고 원스톱센터에서는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고용노동부에서 실업급여 수급 연계지원, 범죄피해로 인한 정당한 사유 퇴사를 인정받았다. 이후 고용노동부에서는 전국 고용센터에 범죄피해로 인한 퇴사자에 대해 실업급여 인정사례를 전달하였고, 원스톱센터의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알리기도 했다.

다만 센터들은 범죄 피해자가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비대면 상담이나 온라인상의 통합지원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백 교수는 “제일 안타까운 것은 사건 초기 단계에서, 범죄 피해자들에 대한 서비스 지원 안내가 부족해서 찾아오지 못하거나 치료의 골든타임을 놓친 사람들”이라며 “비대면 온라인 시스템을 포함해 피해자 입장에서 언제든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간편시스템 도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연평균 27만 건 이상 범죄피해 지원

법무부에 따르면 최근 5년간(2020년~2025년 9월) 법무부를 통해 보호나 지원을 받은 범죄피해자 건수는 총 158만8484건이다. 연평균 27만6000건 이상의 경제적·법률적·심리적 지원이 제공됐다. 피해자에 대한 국선변호사 지원도 올해 1월부터 9월까지만 2만9160건으로 집계됐다. 다만 경제적 지원은 감소 추세다. 범죄 피해자들에 대한 경제적 지원은 2020년 1556건(총 34억4578만4000원)에 대해 지급됐는데, 2024년 1145건(총 32억2841만4000원)으로 지원 건수는 약 26% 감소했다. 지원 금액도 약 6% 줄었다. 이에 대해 법무부는 최근 보건복지부에서 생계비·치료비 등 긴급복지 지원이 확대되는 등 범죄피해자에 대한 지원주체 및 제도가 다변화된 점을 원인으로 들었다.

정유선 법무부 인권구조과장은 “법무부는 피해자에게 지원되는 경제적 지원 금액 자체를 늘리고 통합지원 시스템을 구축하는 등 제도를 개선해 나가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자신의 잘못이 아닌 일로 고통을 겪은 범죄 피해자들이 다시 일상으로 회복할 수 있도록 범죄피해자 인권 주간을 맞아 피해자들에게 많은 관심을 기울여 주시고, 손 내밀어 주시기 바란다”고 말했다.

24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 콘퍼런스룸에서 열린 제18회 범죄피해자 인권대회. 수상자들이 정성호 법무부 장관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법무부 제공
24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 콘퍼런스룸에서 열린 제18회 범죄피해자 인권대회. 수상자들이 정성호 법무부 장관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법무부 제공

한편 법무부는 24일 범죄 피해자 지원 기관과 봉사자들에 대해 상을 수여하는 ‘제18회 한국범죄피해자 인권대회’를 서울 강남구 코엑스 콘퍼런스룸에서 열었다. 김태자 김천구미 범죄피해자지원센터 사무처장 등 3명은 국민포장과 대통령 표창을 수여받았다. 김 사무처장은 2003년부터 범죄피해자 지원 활동을 하며 센터 운영체계의 기틀을 마련하는 등 범죄 피해자 보호·지원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포장을 받았다. 대통령 표창은 이금선 춘천지역 범죄피해자지원센터 이사장, 장은진 대전스마일센터장에게 수여됐다.

곽병두 여주이천양평지역 범죄피해자지원센터 이사장, 문이상 제주한라병원 권역응급의료센터장과 최기순 강릉지역 범죄피해자지원센터 고문은 국무총리 표창을 받았다. 조두현 광주전남 감사와 이명호 천안아산 부이사장은 동아일보 자원봉사상을 수상했다. 이 대회는 법무부와 전국범죄피해자지원연합회가 공동 주최하고 동아일보와 한국피해자학회가 후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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