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자의 인증샷] ‘고현정의 기에도 안 눌린 여배우’, 장영남

  • Array
  • 입력 2011년 6월 1일 16시 04분


코멘트
‘실전에 강하다’라는 말을 듣는 사람들이 있다. 기자 주변에도 제법 되는데, 평소 모의시험 성적은 들쭉날쭉이지만 중요한 시험에서는 고득점에 성공한다든지, 연습장에서는 시원찮은 골퍼가 필드만 나가면 펄펄 나는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하겠다.

내 눈이 틀림없다면 장영남이라는 배우는 실전에 강한 쪽이다.
평소에는 조용한 말투에 크지 않은 몸짓, 수줍은 웃음을 짓고 있어 ‘이 사람이 과연 내가 아는 장영남이 맞나’싶지만, 막상 무대에만 올라가면 180도 사람이 변해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뿜어내니 신기할 정도이다.

“그러게요. 그래서 저를 직접 만나보신 분들은 실망하는 분들도 많으세요.”

인터뷰를 위해 처음 그녀와 노트북, 녹음기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게 된 이쪽으로서도 실망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 당혹스러웠다. ‘장영남을 인터뷰한다’고 하니 드라마 팬인 아내가 “고현정의 기에도 안 눌린 카리스마 강한 배우”라며 은근 겁을 주기도 했던 터라 더욱 그랬다.

장영남은 6월 5일부터 26일까지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하는 연극 ‘산불’에 출연한다. 동네에 사는 과부 중 한 명인 ‘사월이’ 역을 맡았다.
자신의 아이를 지긋지긋해 하고, 하루라도 빨리 괜찮은 남자 하나 꿰차 산골을 떠나고 싶어 하는 현실적인 여인이다.

‘산불’은 한국 최고의 극작가 차범석의 대표작이다.
“배우의 입장으로 봤을 때 엄청나게 친절한 대본예요. 지문이 너무 너무 친절하죠. ‘욕망에 불타오르는 눈빛’ 뭐 이런 식, 하하! 친절하지만,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장영남’하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말이 ‘대학로 캐스팅 1순위’이다. 대학로 연극판에서 ‘장영남’의 이름은 흥행의 보증수표로 통한다. 함께 작업을 하고 싶어 안달하는 극단, 제작사가 줄을 서 있다.

그런 그녀가 ‘산불’을 택했다. 청소년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고전 중의 고전으로 통하는 작품이지만, 그런 만큼 진부할 수도, 요즘 관객의 입맛에 맞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실제로 보면 ‘산불’이 왜 명작으로 통하는지 금세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이 점에 대해 장영남은 솔직했다. 너무 솔직해 이쪽이 무안했을 정도.
“국립극장이잖아요.”

그 동안 소극장 공연을 주로 하다 보니 아직까지 국립극장 대극장 무대에 서 본 일이 없었다. 이 참에 대극장 공연을 한 번쯤 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범석이라는 대가의 고전이라는 점도 당연히 한몫했다.

“손해는 나지 않겠다 싶었죠. 이런 표현은 좀 그런가? 그렇다면 뭔가 스스로 ‘¤(keep)’할 수 있는 기회라고 해두죠.”
장영남은 솔직하다. 그것도 배실배실 예쁜 웃음을 지으면서.

연극뿐만 아니라 영화, 드라마에서도 맹렬히 활동 중이다. 이런 경우 대부분 어느 한 쪽에 치중(밥)하고, 나머지는 기회가 닿거나 필요할 때만 조금씩(반찬) 하는 이들이 많은데, 장영남은 딱히 어느 한편에 기울어지지 않고 적절히 배분한다.
이런 균형감각을 지닌 배우는 좀처럼 보기 힘들다.

“하다 보니까 그런 거지만, 사실 의식은 하고 살죠. 일단 저는 연극이 좋아요. 처음 시작한 자리이기도 하고. 드라마나 영화도 경험을 위해 해야 하는 일들이고.”

그러고 보니 장영남의 화려한 출연목록에 뮤지컬 작품은 단 하나도 없다. 이상할 정도. 혹시 그녀는 뮤지컬 혐오자인 것일까.

“배우를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연극과 뮤지컬이 (엄격히) 구분이 되어 있기도 했고, 개인적으로도 뮤지컬을 하려고 별로 노력한 기억이 없어요.”

언론에서 처음 밝히는 사실이지만, 장영남도 뮤지컬 오디션을 보러 간 일이 있다. 서울예술대학을 갓 졸업한, 배우 지망생 시절의 이야기.
딱히 뮤지컬 배우가 되겠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성악을 배우고, 이것저것 다양하게 트레이닝도 받았다.

“처음 뮤지컬 오디션장에 가서 느낀 건 ‘뮤지컬 배우는 키가 크고 날씬한 사람들이 해야 하는 거구나’하는 것이었죠. 실제로 그런 분들이 캐스팅이 됐고요. 오디션을 보러 가니까 즉석에서 막 춤을 추라고 시키더라고요. 흥미가 없었어요. 솔직히 연극이 더 좋았죠. 훨씬 더 제게는 매력적이었어요.”

그래서 명문 극단 목화에 들어갔다. 1995년의 일이다.
당시의 목화는 그야말로 한국 연극계의 간판이었다. 목화의 작품은 관객뿐만 아니라 배우들 사이에서도 ‘텍스트’로 통하던 시절이었다.

목화 출신 배우들은 목에 깁스를 해도 뭐라 할 사람이 없었다. 그만큼 단원들의 자부심은 컸다. 황정민(여자 황정민이다), 김수로, 박휘순 등이 당시 목화 배우로 활동하고 있었다.

“제가 들어갔을 때는 사실 절정의 끝 무렵이었어요. 80학번 선배님들이 장악하던 시절을 지나 86·87학번 선배들로 물갈이가 되던 시기였죠.”

장영남은 당시 목화의 연습실 분위기를 ‘마치 절간 같았다’라고 회고했다. “파리 한 마리가 날아다녀도 소리가 들릴 듯했다”라고도 했다. 그만큼 엄숙하고 무거웠다. 딱히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무섭게 군 것은 아니었지만, 분위기가 그랬다.

“연습실이 마루바닥이었는데 잘못 디디면 삐그덕 거리거든요. 그 소리 안 내려고 다리에 온 힘을 주고, 살금살금 걸어 다녀야 했죠.(장영남은 이 부분에서 실제로 재연을 해 보였다)”

잠시만 딴 길로 새기로 한다.
영화배우 류승룡은 장영남보다 두 학번, 뮤지컬 배우 이건명은 한 학번 선배가 된다. 두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장영남은 학창 시절 ‘퀸카’였다”라고 입을 모았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는 “그냥 내성적이고 새침떼기 학생이었을 뿐”라고 했다. 어느 쪽이 진실인가.

“지금은 많이 망가져서 … 흐흐흐 할 말이 없는데. 아쉬워요. 그때 잘 했어야 시집을 갔을 텐데. 하하하”

장영남과 인터뷰를 한다고 하니 팬들이 트위터로 팬레터를 잔뜩 보내왔다. 대부분 ‘장영남 특유의 카리스마가 좋다’, ‘연극이든 영화, 드라마든 장영남이 나오면 극의 맛이 달라진다’, ‘늘 공연이 기대되게 만든다’는 찬사일색이었다.

“너무 감사하죠. 그런데 제가 기가 좀 세 보이나 봐요. 딱딱한 역을 많이 해서. 실제로는 전혀 안 그렇고요. 무대에서도 그냥 주어진 일을 즐겁게 할 뿐예요. 평소에 카리스마를 부린다든지, 이런 거 전혀 아닙니다. 말도 잘 안 했는데, 요즘엔 많이 늘었어요.”

영화, 드라마에서도 큼직하게 자리매김을 한 장영남.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연극무대에 대한 애정은 한결같기만 하다. 왜 장영남이란 배우는 물길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연극무대로 회귀하고, 또 회귀하는 것일까.

“갈증이 나요. 연극을 안 하면 못 견디겠어요. 뭔가 안도감을 주거든요. 기회가 된다면 계속 하고 싶은 게 연극이죠.”

“물론 영화나 드라마 일도 꾸준히 해야 한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어요. 연극도 그렇지만 다른 쪽 일도 돈을 벌기 위해 하는 건 아니에요. 경험이 중요하죠. 이것도 해보고 싶고, 저것도 해보고 싶고. 나를 좋게 보아주는 사람이 하나 둘씩 늘어나고. 칭찬을 받고. 그래서 ‘더 열심히 해야지’ 하는 마음이 솟고. 그게 제게는 보상이죠.”

이 인터뷰를 위해 자료를 조사하다 보니, 장영남의 지난 인터뷰 중 이런 대목이 눈에 띄었다. 두 개의 인터뷰는 시차가 조금 난다.

“서른여덟이 되기 전에는 결혼 해야죠”
“(몇 년 뒤) 마흔이 되기 전에는 결혼 해야죠.”

장영남 배우에게 “이제 슬슬 공약을 지켜야 할 때가 된 것이 아니냐”라고 물었다. 가족의 압력도 상당할 듯싶다.

“당연하죠. 30대 중반쯤이 아마 가장 압박이 심했을 거예요. 스물아홉이었나 … ‘로미오와 줄리엣’할 때 ‘좋은 배우와 함께 좋은 엄마가 되는 게 꿈’이라고 인터뷰했던 기억이 나요 흐흐.”

“공약은 지켜야죠. 그런데 ‘이제 해야 한다, 해야 한다’하니까 어느 순간 조급해지더라고요. 재작년부터 조바심, 두려움 … 죽겠더라니까요.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배우로서 내가 하는 일이 잘 하는 건지, 인간답게 잘 살고는 있는 건지. 지금은 마음을 비우려고 하고 있어요. 그런데 참 시간이 빨리 가네요. 올해도 벌써 반년이 다 가버렸잖아요.”

“결혼을 안 해봐서 이런 얘기를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꼭 한 번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 번’이죠. 이 나이에 결혼에서 이혼은 절대 안 되잖아요. 하하하!!”

장영남은 연극판에서 가장 아름다운 배우 중의 한 명으로 꼽힌다. ‘눈이 얼굴의 절반’이라는 말도 있다. 자세히 보면 순정만화에서 툭 튀어 나온 캐릭터 같기도 하다.

“보시다시피(?) 피부관리를 잘 안 해요. 게을러서. 나이가 들면서 체질이 바뀌는지 알레르기가 많이 생기더라고요. 피부가 한번 뒤집어졌어요. 요즘 피부과 다니는데 약만 먹고 있어요. 마사지는 못하고.”

“배우라는 직업이 녹록치 않죠. 본인 스스로도 괴롭히는 편이고, 주변 스트레스도 심하고. 배우들이 밤에 잘 자는 편이 아닌데, 저도 불면증으로 고생했어요. 1년가량 수면제를 먹어본 적이 있죠.”

밤에는 연극 공연을 하고, 다음날 새벽같이 드라마나 영화 촬영장으로 나가야 하는 빡빡한 스케줄은 그녀에게 ‘자야한다. 일찍 일어나야 한다’라는 강박관념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신경이 자꾸만 예민해졌다.

“그런데 그게(수면제) 독약이더라고요. 잠은 잘 수 있지만 정신이 망가져요. 차라리 잠을 못 자고 다음날 피곤한 게 낫더라고요. 요즘엔 잘 자요. 새벽 2시 정도면 자죠. 사실 늦잠은 체질상 못 자요. 어려서부터 집안 분위기가 그랬거든요. 아침이면 아버지가 ‘빰빠라빰~’행진곡을 트시고, 딸들 덮고 있는 이불을 싹 걷어버리셨죠. 하하!”

이 인터뷰 코너는 타이틀에서 알 수 있듯, ‘반드시’라고 할 만큼 인증샷을 찍어야 한다. 매번 인터뷰 후 배우와 인증샷을 찍는다는 일이 번거롭다기보다는 쑥스럽기 그지없는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

인터뷰 후 장영남 배우는 ‘연습실로 가봐야겠다’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환한 웃음으로 짧지만 굵었던 만남을 마무리하고 나가는 그녀의 손에는 기자의 명함이 쥐어져 있었다.

우리는 언젠가 다른 인터뷰 자리에서 재회하게 될 것이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그때는 좋은 배우이자 좋은 아내, 좋은 엄마가 된 장영남이라면 더욱 좋겠다.

스포츠동아 양형모 기자 (트위터 @ranbi361) ranbi@donga.com
사진제공|신시컴퍼니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