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김현진] 스타일 인 셀럽 ⑨ 악동 디자이너, 알렉산더 맥퀸은 왜 자살했나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2월 18일 16시 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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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동 디자이너, 알렉산더 맥퀸은 왜 자살했나

알렉산더 맥퀸의 2003년 6월 미국패션디자이너협회 선정, 올해의 세계 디자이너상 수상 직후 모습. 그는 세계 하이패션계의 주목을 받은 촉망받는 디자이너였다. 사진제공 AP연합
알렉산더 맥퀸의 2003년 6월 미국패션디자이너협회 선정, 올해의 세계 디자이너상 수상 직후 모습. 그는 세계 하이패션계의 주목을 받은 촉망받는 디자이너였다. 사진제공 AP연합
"땡큐, 리 맥퀸."

16일 열린 브릿어워드. 영국의 그래미어워드 격인 이 시상식에서 베스트 인터내셔널 여성 아티스트상을 포함해 3관왕의 영예를 안은 레이디 가가는 눈물 가득한 목소리로 맥퀸을 추모하는 수상 소감을 남겼다.

리 알렉산더 맥퀸. 이 천재 디자이너는 11일 오전 런던 자택 옷장에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현지 경찰은 그가 유서를 남겼다고 밝혔다. 그러나 직접적인 자살 동기가 담겼을 것으로 예상되는 유서의 내용은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겨우 마흔의 나이에 스스로 세상과 이별을 고한 알렉산더 맥퀸, 그는 왜 자살을 택해야만 했을까.

레이디 가가는 브릿어워드 행사 직전 당초 계획했던 퍼포먼스와 의상을 일부 수정하며 애도를 표했다. "내 친구의 충격적인 죽음 앞에 예정된 내용의 공연을 펼칠 기분이 아니다."

'4차원적 퍼포먼스'로는 레이디 가가 버금가는 팝스타 비요크 역시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맥퀸을 보내는 슬픔을 표현했다. 맥퀸은 1997년 그의 '호모제닉' 앨범 커버 디자인을 맡았었다. 'Dear 리, 당신은 대단히 강한 동시에 유약했습니다. … 창의력으로 넘쳐흘렀던 당신과의 작업은 제가 성장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레이디 가가와 비요크, 그리고 맥퀸은 서로에게 뮤즈였다.

다소 파격적인 디자인 때문에 패션계의 악동, '앙팡 테리블'로 불렸던 맥퀸의 죽음 앞에 나오미 캠벨, 사라 제시카 파커, 마돈나 등 셀레브리티들의 추모의 메시지가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의 죽음이 알려진 직후 열린 뉴욕컬렉션에서는 벳시 존슨이 캣워크에 '맥퀸이여 영원하라(Long Live McQueen)'란 글이 적힌 피켓을 올리는 등 동료 디자이너들의 추모 퍼포먼스도 잇따랐다.

맥퀸의 자살은 패션 피플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충격이었다. 1997년 연쇄 살인범의 총격으로 목숨을 잃은 지아니 베르사체 이후 패션계 최대의 비극으로 꼽히면서 일반 대중의 관심이 높아진 것이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11일 자사 인터넷판에 오른 맥퀸 관련 기사, 댓글, 블로그글 등이 전체 포스팅의 45%를 기록해 이날 최고의 화제 검색어가 됐다고 전했다. 맥퀸의 자살 소식은 같은 날 트위터의 '톱 토픽' 10위로 랭크됐으며 국내 각종 포털사이트 검색어 1위에도 올랐다.


맥퀸의 자살 소식이 전해진 직후, 뉴욕의 맥퀸 부티크 앞에는 그의 팬과 지인들이 남긴 꽃다발과 추모 메시지가 수북히 쌓였다.(아래 사진) 영국 런던의 리버티 백화점에도 그를 추모하는 쇼윈도가 꾸며졌다. 사진제공 EPA, AFP 연합.
맥퀸의 자살 소식이 전해진 직후, 뉴욕의 맥퀸 부티크 앞에는 그의 팬과 지인들이 남긴 꽃다발과 추모 메시지가 수북히 쌓였다.(아래 사진) 영국 런던의 리버티 백화점에도 그를 추모하는 쇼윈도가 꾸며졌다. 사진제공 EPA, AFP 연합.
▶ 누구도 흉내 못내는 맥퀸의 예술 에너지

기자는 몇 해 전 밀라노 남성복 패션쇼 기간에 현지 파티장에서 그를 우연히 만난 적이 있다. 짧게 인사를 나누며 들여다본 그의 푸른 눈빛이 유난히 우울해 보였던 것이 기억난다. 그 눈빛은 꿈에 다시 보일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맥퀸의 컬렉션에도 이런 우울함과 '하드코어'적인 정서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1995년 영국 런던에서 열린 컬렉션 '고원의 강간(Highland Rape)'은 18세기 영국 스코트랜드 학살을 표현하기 위해 피로 얼룩진 옷을 입은 모델들을 등장시켰다. 가슴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상의를 입고, 생리대를 엮어 만든 줄을 쥔 채 무대에 오른 모델들은 "그로테스크하다"와 "혁신적이다"는 평가를 동시에 받았다.

최근 가장 화제가 됐던 아이템은 2010년 봄/여름 컬렉션에서 그가 모델에게 신긴 킬 힐 '아르마딜로'이다. 30cm가 넘는 아찔한 굽에 발레리나 토슈즈처럼 끝이 뭉툭한 신발의 몸체를 접합시킨 아르마딜로 슈즈는 일부 모델들로부터 "넘어질까 무서워 못신겠다"는 항의를 받기도 했다.

이처럼 안정보다는 모험, 편안함보다는 가학을 택한 그의 디자인을 놓고 '여성 친화적(woman-friendly)이지 않다'고 비판하는 패션 비평가들도 적지 않았다.

그의 퍼포먼스적 창의력을 계승하고자 하는 의지였을까. 영국의 일부 맥퀸 부티크들은 독특한 쇼윈도 디스플레이를 선보였다. 매장의 창 밖에는 천재 디자이너를 보내는 슬픔을 담은 꽃다발이며 메시지가 수북이 쌓였다. 한 영국 블로거에 따르면 스코틀랜드 멜로즈 인근의 한 매장에는 '맥퀸이여 영원하라'는 메시지와 함께 문상객처럼 검은 옷을 걸친 마네킹들이 유니언 잭을 덮은 맥퀸의 관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 연출됐다.
맥퀸은 자살하기 일주일 전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죽음에 엄청난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은 2001년 그의 어머니 조이스와 런던 '빅토리아&알버트 뮤지엄'에서 함께 찍은 것. 사진제공 AP연합.
맥퀸은 자살하기 일주일 전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죽음에 엄청난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은 2001년 그의 어머니 조이스와 런던 '빅토리아&알버트 뮤지엄'에서 함께 찍은 것. 사진제공 AP연합.
▶ 정상을 향해 달린 그의 커리어

그의 커리어를 살펴보면 '가난한 예술가의 고뇌'나 '창의적 에너지의 고갈'이라는 예술가적인 고민이 죽음의 원인이 되지는 않았으리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1969년 영국 런던에서 택시 기사의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16세에 런던의 고급 양복점 '앤더슨앤셰퍼드'에서 견습생으로 패션 업계에 입문했다. 1994년 영국 최고의 패션스쿨 센트럴세인트마틴스 석사 과정을 졸업했다.

이 학교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훌륭한 멘토를 만난 덕분에 1996년 현재 크리스찬 디올의 디자인 수장인 존 갈리아노의 뒤를 이어 프랑스의 패션 명가 지방시의 수석 디자이너로 발탁돼 2001년까지 일했다.

또 2000년 말 구치 그룹에 회사 지분 51%를 넘기며 파트너십을 체결,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더 맥퀸'과 세컨드라인 '맥큐(MaQ)'를 이끌었다.

그의 장점이자 한계는 예술성과 상업성의 조화였다. LVMH와 구치 그룹이라는 대형 패션 그룹의 산하에서 '아티스틱'한 의상을 추구하는 그가 현실적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패션정보회사 PFIN 이소정 수석연구원은 "맥퀸은 패션의 상업적 요소들과 창의적 요소들 사이에서 균형감을 찾기 어려워했으며 구치 그룹으로부터 매출과 관련한 압력도 적지 않게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사실 글로벌 경제 위기로 최근 많은 패션 하우스들은 매출 감소에 허덕이고 있다. 맥퀸 브랜드의 경우 경제 위기의 타격이 큰 유럽과 미주에 매장이 집중돼 있어 상대적으로 더 큰 손실을 입었으리라는 예측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그의 자살과 연관짓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가 죽던 날 오후에는 세컨드 라인 맥큐의 패션쇼가 예정돼 있었고 알렉산더 맥퀸 브랜드의 파리 패션쇼도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맥퀸이 짧은 시간 내 견고하게 구축한 패션 월드는 어쨌든 순조롭게 굴러가고 있었다.
2010년 봄, 여름 컬렉션에서 선보인 맥퀸의 '아르마딜로' 킬 힐. 그의 패션은 대중적, 상업적이라기보다 실험적, 예술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사진제공 PFIN
2010년 봄, 여름 컬렉션에서 선보인 맥퀸의 '아르마딜로' 킬 힐. 그의 패션은 대중적, 상업적이라기보다 실험적, 예술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사진제공 PFIN

▶ 그를 우울증에 빠지게 한 두 여인, 그리고…

맥퀸의 자살 원인으로는 우울증이 가장 유력하게 꼽힌다. 그는 자살하기 일주일 전 어머니 조이스를 잃었다. 어머니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세상을 살아갈 의욕을 잃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영국 텔레그래프지에 따르면 맥퀸은 어머니를 여읜 하루 뒤인 3일 트위터에 '팔로워 여러분께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나도 당신도 아닌 그녀 본인이-알려드린다. 엄마 편히 쉬세요'란 글을 남겼다.

젊은 시절 족보학자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 조이스는 맥퀸의 정신적 지주였다. 집 밖에서는 늘 강력한 예술적 포스를 보여주었으나 내면은 예민하고 유약했던 막내 맥퀸에게 어머니는 늘 용기를 줬다. 맥퀸은 유난히 자주 어머니와 함께 공식적인 패션 행사에 참가했다. 수차례 언론 인터뷰에 함께 나서기도 했다.

그에게는 또 다른 '어머니'가 있다. 영향력 있는 패션 스타일리스트로 디자인 스쿨에 재학 중인 맥퀸을 발탁, 패션 업계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도와준 멘토 이사벨라 블로다.

블로는 2007년 우울증으로 자살했다. 맥퀸은 그 후 '블로와 다시 만날 날이 올 것이라는 생각을 위안 삼아 산다'고 종종 말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언론이 조심스럽게 제기하는 또 다른 자살 동기는 그의 연애 관계다. 대다수 유명 디자이너들처럼 동성연애자인 맥퀸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그의 '러브 라이프'를 직간접적으로 드러낸바 있다.

텔레그래프지는 그가 지난해 9월 인터뷰에서 "인터넷으로 만난 한 포르노 스타와 데이트를 하고 있으며 그 '미스터 수사슴'과 나는 잘 만나고 있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맥퀸은 자살하기 몇 주 전 미스터 수사슴에게 버림받았다.

신문은 맥퀸이 패션잡지 하퍼스 바자 호주판과의 인터뷰에서 그의 고통스러운 연애 생활에 대해 언급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이 인터뷰 내용은 보도되지 않았다.

미스터 수사슴과 동일 인물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맥퀸은 연인의 이름을 팔에 문신으로 새겨 넣을 정도로 그를 아꼈다. 맥퀸은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나를 버리고 호주로 돌아가 버린 나쁜 놈"이라며 "나는 홀로 남아 팔에 새겨진 그의 이름이나 바라보고 있다"고 말했다.

맥퀸의 이러한 행적은 2005년 64세의 나이로 사망한 독일의 괴짜 디자이너 루돌프 모샴머를 떠올리게 한다. 그는 동성애 파트너였던 25세의 이라크 남성에 의해 살해당했다. 이 남자는 "성관계를 가진 후 약속했던 돈을 주지 않아 죽였다"고 진술했다. 모샴머 역시 어머니를 평생 모시고 살면서 각종 사교계 행사에 함께 참석했고 '엄마와 나'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11일 영국 런던의 자택에서 목을 매 자살한 맥퀸의 시신을 운반하는 경찰들. 사진제공 AP연합.
11일 영국 런던의 자택에서 목을 매 자살한 맥퀸의 시신을 운반하는 경찰들. 사진제공 AP연합.
▶ '포스트 맥퀸'의 분석 나선 냉정한 패션계

냉정한 패션 세계는 벌써 그의 죽음이 경제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부지런히 주판알을 퉁기고 있다.

뉴욕의 럭셔리 산업 컨설턴트 로버트 버크는 블룸버그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베르사체나 샤넬처럼 브랜드명이 디자이너 이름보다 더 확고한 회사들과 달리 맥퀸은 디자이너 본인의 역량이 브랜드의 핵심 가치였던 만큼 앞으로 브랜드를 지키는 것은 무척 힘겨운 일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밀라노의 컨설팅사 인터코퍼레이트의 아르만도 브란치니 부사장은 "10년간이나 공들여 투자한 브랜드를 구치그룹이 속한 PPR이 손쉽게 내치지는 못할 것"이라며 "이 브랜드의 미래는 그의 실험 정신과 창의력을 계승할 만한 디자이너를 얼마나 잘 발굴해 내는지에 달려있다"고 말했다.

구치 그룹의 CEO 로버트 폴레는 말을 아끼는 분위기다. 그는 온라인 성명을 통해 "현재 시점에서 맥퀸 브랜드의 미래에 대해 논하고 싶지 않다. 다만 맥퀸의 디자인팀에는 나와 리(맥퀸)가 모두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해 온 능력 있는 디자이너들이 많다"고만 밝혔다.

이처럼 냉정한 패션계에 경종을 울리고 싶어서였을까. 한 영국 패션칼럼리스트는 '순수한 영혼을 가진 한 아티스트가 가장 냉혹하고 원초적인 패션계에서 고생하다 떠났다'고 추모했다.

화려하게만 보이던 그의 사십 해 인생이 행복했는지, 불행했는지 알 길은 없다. 다만 파격적인 창의력으로 세계를 놀라게 했던 그의 부재는 패션계와 대중 모두에게 확실히 불행한 일이 될 것 같다.

김현진 기자 brigh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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