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박지하] 드라마 <미남이시네요>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10월 29일 12시 3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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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녀들은 언제나 테리우스를 택할까?

그녀들을 위한 판타지물에 공식이 있다면 '캔디캔디'가 아닐까. 요즘 10대라면 어렸을 때 캔디를 본 적이 없어 테리우스나 안소니는 잘 모를 수도 있지만, TV를 통해 캔디의 수많은 변주곡들을 보았으니 줄거리는 익숙할 것이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고 예쁠 것도 없는 고아 소녀 캔디. 못된 부잣집 아이들의 구박에도 부드러운 미소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는 섬세한 미남 안소니. 안소니와는 전혀 다른 불량하고 터프한 매력의 테리우스.

안소니와의 만남이 눈물을 닦아 줄 왕자님과의 대면이었다면, 테리우스와의 그것은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싸가지와의 조우였다. 바로 '꽃보다 남자'의 두 남자 주인공들과의 첫 만남과 같은 구조다.

지후선배가 안소니라면 구준표는 테리우스다. 원작에서는 안소니가 일찍 죽어버려서 테리우스와 본격적 경쟁구도가 성립되지 않지만, 변주곡들은 보다 두 남자를 직접적인 경쟁구도로 만든다.

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는 전형적인 테리우스 캐릭터다.
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는 전형적인 테리우스 캐릭터다.

지후는 안소니, 구준표는 테리우스

물론 변주곡이니 좀 더 현대적이고 복잡해지긴 했지만, 꿋꿋한 마음과 밝은 미소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여주인공이 상반되는 매력을 가진 두 남자 사이에서 행복한 고민을 하게 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최근 '미남이시네요'가 방영된 이후 '낯선 남자에게서 지후선배의 향기가 난다'는 단평이 보여주듯이 미남이시네요의 안소니는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러운 신우다. 테리우스는? 물론 황태경. 캔디캔디의 테리우스와 어릴 때 해어진 어머니는 유명한 배우이고 그 영향을 받아서인지 테리우스도 배우의 길을 걷는데, 황태경의 어머니도 유명한 가수이고 황태경도 가수이니 이런 테리우스가!

'캔디형 여주인공' 이라는 말이 무리 없이 통용되는 것을 보면, 캔디는 어느 사이 하나의 원형(archetype)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캔디처럼 여러 드라마에서 반복되는 또 다른 원형으로는 신데렐라가 있다. 그러나 캔디는 신데렐라와는 다른 선을 긋는 근대적인 원형이다.

두 이야기는 얼핏 비슷한 느낌이 들지만, 캔디가 천애고아인 반면 원래 신데렐라는 아름다운 귀족 아가씨였다. 신데렐라는 사실 무일푼에서 신분상승으로 팔자를 고친 여자가 아니라, 응당 받아야 할 대접을 받지 못하다가 그에 대해 더 큰 보상을 받는 여자다. 신데렐라를 도와주는 착한 마녀는 그녀의 신분을 보장해 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인물, 다름 아닌 친어머니이다.

어릴적 만화 주인공인 캔디는 아무것도 타고나지 못한 평범한 사람의 승리를 의미한다.
어릴적 만화 주인공인 캔디는 아무것도 타고나지 못한 평범한 사람의 승리를 의미한다.
신분사회 극복한 캔디의 특별함

'타고난 혈통'은 21세기에도 여전히 많은 주인공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거나 그들의 발목을 잡는다.

'신의 물방울'의 주인공은 와인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심지어 관심조차 없었는데도 진짜 아들이라는 이유, 그에 따라 천재적인 감각을 타고 났다는 것만으로 빡세게 노력하고 있는 잇세에 비해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해리포터' 역시 비록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내긴 하였으나 부모님의 은덕으로 주목받는 마법사이다. 드라마 '식객'도 대령숙수의 진짜 후손과 자기가 진짜인 줄 알고 있던 가짜 후손 사이의 대립각이 중심이다.

결론은? 언제나 원조들의 승리였다. 원조들은 구김 없이 밝고 사랑스럽고, 나머지들은 타고나지 못한 것을 탐내는 독기가 흐르는 것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캔디는 조금 다르다. 캔디는 아무것도 타고나지 못한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이다. 지체 높은 집안은 물론이고, 외모조차 아니다. (물론 TV에서는 환상적인 외모의 여주인공이 등장하지만, 어쨌거나 그들도 설정은 '아주 예쁘지는 않은 것'으로 되어있다. 악역을 맡은 배우들은 '매우 예쁜 것'으로 설정이 되어있고.) 보통 사람들의 감정이입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캔디의 매력은 아무것도 타고나지 못한 사람들을 특별한 존재로 만드는 데서 온다. 테리우스의 후예들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덕목 중 하나가 '싸가지 없음'인 것도 그 이유이다. 평소에 남들에게 까칠할수록 그가 캔디에게 잘 해주는 것의 특별함이 배가된다.

'꽃보다 남자'나 '미남이시네요'에서는 안소니를 원래 친절하긴 하지만 감성이 매마른 캐릭터로 만들어 안소니의 애정을 더욱 특별한 것으로 만든다. 아무것도 타고나지 못한 내가 특별해지는 이 과정. 캔디가 주는 짜릿한 판타지는 거기서 더욱 극대화된다.

캔디들이 신분제 바깥의 존재라면, 테리우스들은 그 안에 확실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으나 바깥으로 튀어나가려는 반항적 존재들이다. 테리우스들은 집안은 빵빵하나 그 자리가 편안하지 않다. 구준표는 지배적인 어머니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어하고, 황태경은 기획사 사장님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은 것을 넘어 고미남을 도와 사장을 끊임없이 속이고 있다.

만약 그저 사회의 룰을 따라 열심히 살려고 한다면 그는 테리우스로서 실격이다. 테리우스들은 기존 체계가 가지고 있는 균열들이다.

SBS 드라마 <미남이시네요> 전형적인 안소니와 테리우스를 그린 작품이다.
SBS 드라마 <미남이시네요> 전형적인 안소니와 테리우스를 그린 작품이다.

안소니가 승리하면 재미가 없다?

그래서 캔디의 짝으로는 언제나 테리우스가 승리한다. 기존의 질서에 잘 들어맞는 안소니들은 캔디가 주는 판타지와 어딘가 어그러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테리우스가 고분고분해지는 순간 사랑은 이어질 수 없다. 구준표가 질서를 따라 재벌 후계자로서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 순간 캔디의 판타지는 신파극이 되어버릴 위험에 처한다. 황태경이 그룹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고미남의 비밀을 용납하지 않는 순간 '미남이시네요'는 무너지고 만다.

그러나 어떤 전개가 이어져왔던지 간에 판타지는 결국 판타지. 원작 '캔디캔디'에서도 결말은 테리우스와의 어쩔 수 없는 결별 이후 난데없이 알버트 아저씨가 숨겨진 후원자임이 드러나면서 해피앤딩으로 끝난다.

꽃보다 남자에서는 구준표 대신 구준표 편인 누나를 그룹의 회장으로 만들면서 해피앤딩을 만들어냈지만 말이다. 그저 둘이 어디선가 둘 만의 힘으로 잘 먹고 잘 살았다는 결론은 너무 시시하기 때문일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없이 행복한 결말은 판타지로서 매력도가 떨어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21세기에 드라마를 보는 우리에게 이제 캔디 변주곡의 소구점은 그저 출연진의 빼어난 외모로 수렴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타고난 것이 없는 여자'와 '타고난 것이 싫은 남자'의 러브스토리가 앞으로 어떻게 마무리될지, 나는 새로운 원형을 여전히 기다린다.

박지하 / 칼럼니스트 jihapar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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