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칼럼]조미옥/'또순이 언니'에 대한 추억

  • 입력 2003년 7월 24일 18시 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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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미옥
며칠 전 오랜만에 어린 조카 둘을 데리고 서울 강북구 수유동 집 근처 재래시장을 찾았다. 행여 놓칠세라 길게 뻗은 좁은 샛길을 아이들 손을 꼭 잡고 걷고 있는데 저만치서 누가 쏜살같이 돌진해 오고 있었다. 그이와 가까워질수록 화선지에 먹물이 번지듯 난 가슴속 깊숙한 곳에서 따뜻한 뭔가가 번져 가는 걸 느꼈다. ‘여전히 잘 살고 계셨구나!’ 내 유년 시절의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있던 그녀, ‘또순이 언니’였다.

짧은 단발머리에 까만 얼굴, 작은 키에 유난히 굵고 짧은 팔다리로 걷는 모습이 꼭 펭귄을 연상시킨다. 목소리는 또 어떤가. 이로 딱딱 끊어내듯 말하는 음절 사이로 드럼통을 긁는 듯한 쇳소리가 나는 부자연스러움. 그녀는 여전했다.

이른바 ‘정신지체 장애인’인 그녀는 할 일이 무척 많은 사람이었다. 낮에는 모교인 근처 초등학교에 나타나 따돌림당하는 아이들을 구해주고, 휴지를 줍거나 주번 노릇을 한다. 교내 곳곳에 출몰해 위기에 처한 아이들을 도와주며 선생님 행세를 하고 다녀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다. 방과 후면 시장에서 무거운 짐을 대신 날라주고 품삯을 받는다. 시장에서 그는 터줏대감으로 불릴 정도다. 사람들 일에 일일이 참견하고 갑자기 나타나 놀라게 하지만, 어려운 이웃을 보면 절대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다친 사람을 업어주고 가게도 봐주는 등 온갖 심부름을 다 한다. 심지어 ‘도둑’도 잡는다. 온전하지 않은 정신에도 그런 따뜻한 배려와 봉사정신을 실천하는 사람을 나는 아직까지 본 적이 없다.

그녀가 어디 사는지, 가족은 있는지, 특히 나이가 몇인지에 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그녀는 정말 우리 동네의 ‘산소 같은 여자’다. 이젠 나이가 들어서인지 1년에 한두 번씩 시장에서 만날 수 있지만 여전히 마주칠 때마다 반갑다. 아마도 내 유년 시절의 기억이 그녀의 얼굴에서 오버랩되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새 복숭아 하나를 우적거리며 씹어먹는 그녀가 보인다. 늘 그랬듯 제 것인 양 그냥 집어 들었을 것이다. 필자는 앞뒤로 팔을 세차게 흔들며 총총걸음으로 사라지는 그녀를 보며 조카들에게 한마디해 주었다. “얘들아, 방금 원더우먼 지나갔다!”

조미옥 ㈜KCN컨설팅 홍보대행 1팀장

서울 강북구 수유5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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