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대선/취재기자 방담]미디어선거 안방유세 『활짝』

  • 입력 1997년 12월 17일 20시 49분


《지난달 26일 공식적인 선거운동이 시작된 이후 본보 정치부기자들은 독자에게 좀더 바른 정보와 판단근거를 전달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를 위해 주요 후보의 유세과정을 빠짐없이 지켜보고 각 당의 선거전략과 움직임 등도 심층취재해 공정하게 보도해 왔다. 숨가쁘게 대선현장을 누벼온 일선기자 11명이 16일 오후 함께 모여 이번 선거를 정리하는 방담을 했다.》 ▼미디어선거 본격 개막▼ ―이번 선거의 가장 큰 특징은 뭐니뭐니해도 본격적인 「미디어선거」가 시작됐다는 것일 겁니다. 이때문에 이번 선거는 「거리」가 아니라 「안방」에서 승패가 결정날 것이라는 평가가 많습니다. ―그렇습니다.각 후보진영도 첫 미디어선거전에 맞춰 홍보전에 사활을 걸었죠. 그 가운데서도 TV합동토론회의 열기가 가장 뜨거웠습니다. ―선거운동개시이후 처음 열린 1차 TV토론회(1일) 직전 세 후보진영은 서로 가운데 좌석을 차지하기 위해 신경전을 벌였습니다. 이때문에 좌석순서를 정하는 추첨을 누가 먼저 할 것인지를 추첨하는 등 추첨만 네차례나 하기도 했습니다. ―후보간 설전(舌戰)이 가장 돋보인 것은 지난달 26일 동아일보사가 주최한 합동토론회였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이 자리에서 후보들은 「양자(養子)―적자(嫡子)론」 「남이가, 남이여」 등 신조어를 양산해서 선거기간내내 화제가 됐습니다. ―세 후보진영은 토론회 성적이 곧바로 지지율변동으로 이어지자 토론회전략 수립에 사활을 걸었습니다.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후보는 안정적인 스타일을 강조하는데 주력했고 국민신당 이인제(李仁濟)후보는 단답형 임기응변에 능했다는 게 중평입니다. 귀납적 논리전개방식에 익숙한 김대중(金大中)후보는 『처음부터 결론을 얘기하라』는 측근들의 주문에 따라 답변방식을 고치느라 애를 썼습니다. ―방송연설이나 광고전도 치열했습니다. 각 후보진영은 지명도가 높은 찬조연사를 모셔오느라 삼고초려를 하기도 했습니다. 한나라당은 방송출연을 거부해온 이회창후보의 부인 한인옥(韓仁玉)여사를 16일 전격 투입했고 국민회의도 이회창후보 두 아들의 병역의혹을 겨냥한 「어머니의 눈물」편을 막판에 내보내는 등 물밑 신경전도 뜨거웠습니다. ―돈이 없어 한때 TV연설을 포기했던 이인제후보는 입당한 이병호(李丙昊)씨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체면」을 살렸습니다. 이후보 진영은 『한번 출연에 3억여원이나 드는 방송연설은 고비용정치구조의 전형』이라며 돈없는 설움을 자주 토로했습니다. ―인쇄물을 통한 홍보전도 비슷하지 않았나요. ―후보들은 주요 쟁점이 돌출할 때마다 긴급당보 발행이나 신문광고 게재 등으로 기민하게 대응했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신문광고 문안을 몇번씩이나 고칠 정도였습니다. ▼여론조사와 지역감정▼ ―「미디어선거」와 함께 이번 대선에서는 어느때보다 여론조사가 선거전을 주도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선거법상 선거운동기간에는 여론조사결과를 공표할 수 없게 돼 있어 허위여론조사가 난무하기도 했습니다. 본사에도 여론조사한 것이 있으면 결과를 알려달라는 독자들의 문의전화가 많았습니다. ―대표적으로 한나라당이 동아일보가 실시하지도 않은 여론조사내용을 발표해 물의를 빚었습니다. 국민회의는 한나라당이 20여개의 여론조사기관을 매수해 조사내용을 왜곡하려 했다고 주장했고 한나라당은 국민신당이 선거 막판에 하지도 않은 모 언론사의 여론조사결과를 유인물로 만들어 무차별 살포했다고 비난하는 등 여론조사를 둘러싼 공방전도 대단했습니다. ―각 정당은 선거 막판에는 거의 매일 자체적으로 여론조사를 했는데 유리한 것은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불리한 것은 감추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여 빈축을 샀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한때 한나라당은 이회창후보와 김대중후보간의 지지도차가 크게 벌어졌다고 주장하고 국민회의는 정반대로 박빙이라고 주장해 취재진을 어리둥절하게 했습니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한나라당은 반(反)DJ정서를 자극하기 위해서였고 국민회의는 이를 막기 위해 역정보를 흘렸다고 합니다. ―이번 선거에서는 어느 선거보다도 지역감정에 호소한 선거운동이 줄어들었습니다. 그러나 한나라당 김윤환(金潤煥)선대위의장이 경남지역 필승대회에서 「우리가 남이가」를 주장하면서 다시 지역감정이 도졌습니다. 92년 대선때는 김영삼(金泳三)후보가 TK(대구 경북)쪽을 향해 「우리가 남이가」를 주장했는데 이번에는 거꾸로 된 셈입니다. ―선거 막판에는 한나라당이 영남지역에서 「이인제후보를 찍으면 김대중후보가 당선한다」는 「사표(死票)방지론」을 집중적으로 홍보했는데 이 역시 지역감정의 변종이었습니다. ―그러자 이인제후보는 「이인제를 찍으면 이인제가 당선한다」고 맞섰습니다. 이후보를 지원했던 개그맨 김형곤씨는 한 유세장에서 사진기자들에게 『(카메라로)이인제를 찍으면 (사진에) 이인제 얼굴이 나오지요』라고 한나라당 주장을 반박해 폭소가 터지기도 했습니다. ▼사라진 금권-관권선거▼ ―금권 관권선거나 조직선거가 거의 없었다는 것도 선거사에 기록될 만한 일로 생각되는 데요. 이때문에 정치권 내부에서는 『공명선거도 좋지만 선거판이 너무 썰렁한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거기에는 복합적인 요인이 있을 겁니다. 한보사태와 YS대선자금 문제에 따른 정치권과 재계의 몸조심, 김영삼대통령 탈당에 따른 여당부재 현상, 이회창후보의 지정기탁금포기 등이 한꺼번에 겹친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IMF한파로 인한 우울한 사회분위기가 부정탈법을 차단하는 데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국민이 국가부도 위기를 피부로 실감하기 시작한 이달초에는 민심이 극도로 흉흉했습니다. 이때문에 각당은 「유세가 오히려 유권자들을 자극한다」며 예정된 거리유세 등을 취소하기도 했습니다. ―한 후보의 지방유세를 따라갔었는데 예정보다 유세장에 10분쯤 일찍 도착하기도 했지만 청중이 10명도 안 모여 있었습니다. 후보의 얼굴이 굳어졌고 수행한 측근들은 『여기는 원래 사람이 없는 동넵니다』 『그냥 가십시다』 『누구 지역구야』라며 우왕좌왕하던 기억이 납니다. ―한나라당 일선조직이 미약하나마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지난달 중순경부터가 아닌가 합니다. 초창기에 「설마」하며 중앙당에서 「실탄」을 내려보낼 것으로 기대했던 일선조직들이 아예 기대를 포기하고 마음을 고쳐먹기 시작한 것이지요. ―국민회의쪽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과거 선거때 가장 활발했던 조직본부는 손을 놓다시피 했습니다. ―돈문제에 관한 한 최대 피해자는 아마도 국민신당같습니다. YS의 2백억원 지원설 때문에 이인제후보의 지지율이 급락했지만 돈가뭄은 제일 심했습니다. 현찰을 내야 하는 방송광고는 엄두도 못냈고 외상을 할 수 있는 신문광고도 다른 당과는 상대가 안됐습니다. ▼폭로-비방전 구태 재연▼ ―금권 관권선거는 줄어들었는지 모르지만 폭로전은 전혀 줄지 않은 것 같습니다. 손대희(孫大熙)중령의 시국선언에 이어 병무청 직원 이재왕(李載汪)씨, 사채업자 강동호(姜東豪)씨의 「양심선언」이 줄줄이 터져나왔습니다. 그러나 판세를 뒤흔들 만한 메가톤급은 없었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국민회의와 국민신당이 폭로전을 주도했다는 점도 특징입니다. 손중령이나 이재왕씨, 강동호씨 등 「양심선언자」들의 폭로내용이 주로 한나라당을 겨냥한 것이었습니다. ―한나라당은 이회창후보 장남의 고의감량의혹과 연수원을 담보로 한 사채조달의혹 등 연이어 터져나온 악재 때문에 전전긍긍했습니다. 이때문에 이재왕씨 폭로에는 「10억 매수설」로 국민회의에 역공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강동호씨가 폭로한 사채조달의혹은 한나라당도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강씨가 당 천안연수원 등기권리증과 백남치(白南治)조직본부장의 통화내용녹취록, 조순(趙淳)총재의 인감 등을 증거물로 내놓자 한나라당 관계자들은 『정말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었지요. 결국 『여당이 얼마나 돈이 없으면 사채시장까지 갔겠느냐』는 동정론으로 방어막을 쳤지만 매우 「아픈 표정」이었습니다. ―반면 강씨의 폭로를 유도한 국민회의측은 『이제 선거는 끝났다』며 의기양양해 했지만 파문이 의외로 적자 크게 실망했습니다. 국민회의의 한 당직자는 『만일 김대중후보가 사채시장에서 돈을 빌리려 했다면 언론에서 가만히 있었겠느냐』며 『외국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다면 이회창후보가 사퇴해야 할 사건』이라고 흥분하기도 했습니다. ―한나라당이 선거전중반까지 폭로전을 자제했던 것은 「김대중후보 비자금의혹」을 폭로한 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중론입니다. 당시 한나라당은 자료입수과정의 불법성 논란과 『여당이 금융실명제를 앞장서 무력화했다』는 비난 등의 역풍(逆風)에 휘말려 『오히려 표만 깎였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지요. ▼경제파탄 책임론 공방▼ ―이번 선거의 최대이슈는 아무래도 IMF의 구제금융까지 받게 된 국가부도위기사태가 아닌가 합니다. 한마디로 「IMF선거」라고 할 정도로 선거에 미친 영향은 결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죠. ―그렇습니다. 선거종반인데도 부동층이 되레 늘어나 막판까지 혼전양상을 띠지 않았습니까. 경제파탄에 따른 정치권의 무능과 유권자들의 불신, 무기력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탓이죠. 각 후보진영도 발빠르게 선거전략을 수정하면서 기민하게 대응했습니다. ―하지만 과거 여당으로서의 책임을 면키 어려운 한나라당이 경제파탄 책임공방으로 가장 큰 피해를 봤습니다. 후보등록직후 계속 상승세를 타던 이회창후보의 지지율이 정체한 것이 단적인 사례입니다. ―그러나 김대중후보도 재협상론을 주장해 외환위기를 가중했다는 비난을 받고 지지율에서도 손해를 봤습니다. ―IMF사태에 대처하는 후보들의 언행은 좀더 신중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인제후보도 처음에는 재협상이 필요하다는 쪽에 무게를 실었다가 나중에 다단계협상론으로 입장을 바꿨는데 경제계에서는 대선후보를 비롯한 정치인들이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게 아니냐는 말을 많이 합니다. 〈정리〓박제균·이원재·윤영찬·정연욱·김정훈기자〉 △일시〓12월16일 오후 7∼9시 △장소〓동아일보 서울충정로사옥 7층 회의실 △참석자〓임채청 최영묵 김재호 송인수 정연욱 최영훈 김창혁 이철희 이원재 김정훈 윤영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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