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더 취약한 ‘코로나 블루’…자살률 줄이려면 ‘내진 설계’ 튼튼해야[박성민의 더블케어]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9월 10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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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지망생 김모 씨(28·여)는 지난달부터 정신건강의학과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우울증 때문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후 공연이 잇따라 취소되면서, 김 씨는 5개월 넘게 무대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 매달 월세를 내는 것도 버겁다. 생활비를 충당해 온 카페 아르바이트도 지난달 사회적 거리 두기가 강화되면서 그만뒀다. 그는 “하루 종일 말 한마디 안 하는 날도 많다”며 “(코로나19의) 끝이 안 보인다는 게 너무 힘들다”고 말했다.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여성의 정신건강 관리에 빨간불이 켜졌다. 특히 젊은 여성들이 위험 신호를 보내고 있다. 고용 시장에서 가장 밀려나기 쉬운 취약 계층인데다, 비대면의 확산으로 사회적 유대감마저 약해졌기 때문이다. 짙어진 ‘코로나 블루’는 극단적 선택으로 이어질 확률이 높다. 전문가들은 고위험군 발굴과 맞춤형 지원을 서두르지 않으면 ‘팬데믹 세대’의 트라우마(정신적 외상)가 지속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올해 자살 사망자 추이. 그래픽=강동영 기자 kdy184@donga.com
올해 자살 사망자 추이. 그래픽=강동영 기자 kdy184@donga.com


● “20대 여성 자살 시도 2배로 늘어”
여성의 위기는 수치로도 확인된다. 중앙자살예방센터에 따르면 올 상반기 여성 자살 사망자(잠정치)는 1924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7.1% 늘었다. 남성이 6.1% 감소했고, 전체 사망자도 2.4% 줄어든 것과 대조적이다. 통상 남녀 자살률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 2010년, 2011년, 2013년에만 남성 자살률은 오르고 여성은 줄어드는 반대 흐름이 나타났다. 여성 자살률만 증가한 것은 1987년 통계 작성 후 올해가 처음이다.

전문가들도 긴장하고 있다. 최근 여성 자살률 추이가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해 총 자살사망자(잠정치)는 1만2889명으로 전년 대비 5.7% 감소했다. 남성(9109명)이 7.6% 줄어든 영향이 컸다. 여성(3780명)은 0.07% 감소에 그쳤다. 신은정 중앙자살예방센터 부센터장은 “2018~19년 연예인들의 자살이 있은 뒤 젊은 여성들의 극단적 선택이 늘었다”고 말했다. 유명인의 자살을 모방하는 ‘베르테르 효과’다.

악화된 여성 고용 지표들. 그래픽=강동영 기자 kdy184@donga.com
악화된 여성 고용 지표들. 그래픽=강동영 기자 kdy184@donga.com

하지만 올해의 여성 자살률 증가는 이와는 별개의 흐름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줄어든 일자리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 3~7월 일시 휴직자 수는 여성이 101만6000명으로 남성(60만8000명)보다 67%나 많았다. 코로나19의 충격이 대면 중심의 서비스업에 집중되면서 해당 업종 종사자가 많은 여성들의 피해가 컸다.

김현수 서울시 자살예방센터장은 “최근 카드 연체율, 주거지원 요청 현황 등을 보면 20대의 경제적 어려움이 가장 크다”며 “올 들어 서울시의 20대 여성 자살 시도자는 예년의 2배 수준으로 급증했다”고 말했다. 이어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여성 1인 가구가 실직 후 (자살) 고 위험군이 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 돌봄 부담 가중에 기혼여성 스트레스도 증가
“코로나19가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정신보건 위기를 일으키고 있다.”

지난달 세계보건기구(WHO)는 감염에 대한 불안감 뿐 아니라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한 외로움이 개인 정신 건강을 크게 해칠 수 있다며 이같이 경고했다. 상대적으로 방역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 한국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다. 올 들어 지난달까지 보건복지부 자살예방 상담전화 접수 건수는 11먼8006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4만8656건)에 3배 가까운 것으로 나타났다.

그래픽=강동영 기자 kdy184@donga.com
그래픽=강동영 기자 kdy184@donga.com


코로나19가 여성의 돌봄 부담을 높인 것도 여성의 정신 건강에 악재다. 가족 모두가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스트레스도 증가한다. 김유라 수원시 성인정신건강복지센터 팀장은 “센터의 위기개입 사례가 지난해 56건에서 올해 237건(8월 말 기준)으로 크게 늘었다”고 말했다. 김인아 한양대 직업환경의학교실 교수는 “남녀가 같이 재택근무를 해도 여성이 가사나 양육 부담을 더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 한국 젊은 여성들이 처한 현실도 자살률을 높이는 배경이 된다는 분석도 있다. 남녀평등을 당연한 것으로 교육받아 온 20대 여성들이 사회에 진출하거나 가정을 꾸린 뒤 기대와 다른 현실을 마주했을 때 더 큰 좌절을 느낀다는 것. 장숙랑 중앙대 적십자간호대학 교수는 “여성 자살률은 1951년생(60대)보다 1982년생(30대)이 5배, 1997년생(20대)은 7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며 “가정 폭력, 성폭력에 노출되거나 주거, 일자리 등 불평등한 사회 구조를 접하면서 좌절감도 커진 것 같다”고 했다.

서울지방경찰청제공.
서울지방경찰청제공.


● 하반기 지표도 우려…선제적 발굴·지원 시급
더 큰 위기는 이제 시작일수도 있다. 2003년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피해가 컸던 홍콩에선 그 해 65세 이상 노인 자살률이 전년보다 31.7% 급증했다. 청년, 여성뿐 아니라 고립감을 느끼거나 돌봄이 단절된 다양한 계층에서 자살률이 오를 수 있다는 의미다.

상반기 고용 지표 악화로 인한 고통이 하반기에 본격적으로 반영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김인아 교수는 “(경제 위기 시)실업률 증가와 자살률 증가는 대개 6개월 정도 시차가 있다”고 말했다. 특히 경제적 요인으로 인한 자살률 상승은 남성에게 영향이 더 크다.

코로나19 재확산으로 위기가 반복될 때마다 ‘버티는 힘’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백종우 중앙자살예방센터장은 “코로나19 초기에는 ‘다 같이 이겨내 보자’는 연대 의식이 그나마 극단적 선택을 줄였을 수 있다”며 “1, 2년이 지나도 일상이 회복되지 못하면 더 큰 좌절감을 느끼게 된다”고 분석했다.

재난이나 경제 위기가 올 때마다 자살률이 반드시 증가하는 것은 아니다. 정부와 사회가 외부 충격을 흡수할 ‘내진 설계’를 얼마나 튼튼히 했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경제 위기를 겪은 상당수 국가들이 이로 인한 ‘초과 자살자’가 생겨났다. 한국도 전년보다 인구 10만 명 당 5명의 초과 자살자가 보고 됐다. 하지만 스웨덴은 적극적인 실업 대책, 취약 계층 주거 지원 등으로 초과 자살자가 거의 관찰되지 않았다.

백종우 센터장은 “자살상담 전화, 실업급여 수급자 등 고용과 복지 행정망에 포착되는 자살 고위험군을 조기에 발굴해 지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최명민 백석대 사회복지학부 교수는 “노인연금 도입 후 노인 자살률이 낮아진 것처럼 각 연령대나 계층에 맞는 지원 대책이 필요하다”며 “취약 계층에 대한 선제적 지원이 있어야 자살률 상승을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 예방 핫라인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박성민 기자 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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