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제화 방치… 정치권-정부 직무유기”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9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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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車 통상임금 1심]2013년 갑을오토텍 대법 판결뒤
정부, 강제성 없는 지침만 제시
노사, 판례-지침 아전인수 해석
재계 “최저임금에 상여금 포함해야”

2013년 대법원이 통상임금의 범위를 규정했음에도 통상임금을 둘러싼 노사 분쟁이 끊이지 않는 근본 원인은 정치권과 정부의 ‘직무유기’에 있다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정치권과 정부가 통상임금 법제화를 사실상 방치하면서 이번 기아자동차 소송에서 보듯 기업의 혼란과 노사 갈등을 키웠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행 근로기준법에는 통상임금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다. 2010년 이후 통상임금 분쟁이 급증하자 결국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13년 12월 갑을오토텍 판결에서 “정기적, 고정적, 일률적 상여금은 통상임금에 포함되지만 재직자에게만 지급하는 상여금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정리했다. 고용노동부는 2014년 1월 이를 반영한 새 지침을 마련했다.

그러나 지침은 말 그대로 지침이다. 반드시 지킬 필요가 없다. 특히 대법원이 임금의 소급 청구를 제한하는 논리로 제시한 ‘신의 성실의 원칙’은 법원마다 판단이 제각각이었다. 이 때문에 기아차처럼 노사가 지침과 판례를 각자 유리하게 해석하며 ‘버티기’로 일관하면서 분쟁이 급증했다. 노조는 일단 제기하고 보자며 줄 소송에 나섰고, 사측은 재판에서 지더라도 배상은 하지 않을 수 있는 ‘신의 성실의 원칙’에 기대 온 셈이다.

사실 통상임금 법제화 기회는 여러 차례 있었다. 2014년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는 ‘노사정 소위원회’를 만들어 통상임금 법제화를 시도했지만 합의에 실패했다. 이후 박근혜 정부는 대법원 판례를 반영한 노동개혁 4대 입법으로 밀어붙였지만 이듬해 20대 총선에서 참패한 데 이어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추진 동력을 잃었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근로시간 단축 같은 노동 이슈가 국정 우선순위에 오르면서 통상임금 문제에 대한 관심이 멀어진 상황이다. 국회 환노위 관계자는 “이번 정기국회에서는 근로시간 단축이 최우선 과제”라고 말했다.

통상임금 법제화는 최저임금 산입범위 확대로 이어질 수 있어 재계가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재계는 정기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포함된다는 판례를 법제화한 다음 최저임금 산입범위에도 상여금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지난달 30일 여야 대표를 만나 “근로기준법에 통상임금 기준을 담아 달라”고 요구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노동계도 최저임금 범위를 넓히는 것엔 반대하지만 통상임금 법제화 필요성을 인정한다. 이병훈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명확한 규정을 담은 법제화로 사회적 혼란을 줄이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며 “국회와 정부가 방향을 제시하고 공론화 과정을 거쳐 논쟁을 풀어 나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유성열 기자 ry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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