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분별 투자 막으려 규제 강화했더니…지하시장으로 몰린 개미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25일 19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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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이모 씨는 고교동창으로부터 “미국 달러에 투자해 수익률 200%의 대박을 터뜨렸다”며 함께 투자하자는 솔깃한 제안을 받았다. 개인이 장외에서 외화를 직접 거래해 환율변동에 따른 차익을 올리는 ‘외환차익거래(FX마진거래)’라는 투자였다.

동창은 서울 송파구의 ‘선물 아카데미’에서 거래에 필요한 교육을 받고 투자를 할 수 있다고 했다. 찾아간 사무실에는 사람들이 북적였다. 이 씨는 업체에 300만 원을 내고 3개월간 교육을 받았다. 거래계좌를 트는 데 증거금으로 2000달러(약 220만 원)도 냈다. 그는 “증권사에서는 증거금으로 최소 1만 달러를 내야하는데 여기선 훨씬 적어 쉽게 투자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3000만 원으로 거래를 시작한 그는 결국 돈을 다 날렸다. 업체 측은 그에게 “다른 투자자를 더 데려오면 돈도 찾고 자동차도 받을 수 있다”고 꾀었다.

이 업체는 불법 FX마진업체로, 현재 피해자가 100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2009년에 이어 2012년 정부가 FX마진거래 증거금을 대폭 인상한 뒤 증권·선물업계는 사실상 FX마진거래영업을 포기했다. 하지만 불법업체는 오히려 늘어 이런 다단계 업체로까지 진화했다.

○시장진입 막힌 개인들, 불법업체로

이는 최근 3년 새 거래량이 80% 이상 쪼그라든 한국 파생상품 시장의 어두운 그림자다. ‘개미들의 증시 막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무분별했던 개인들의 투기 행태를 막기 위해 정부가 규제를 강화했지만 오히려 음성적인 지하시장이 커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선물 투자에 관심을 갖게 된 김모 씨는 최근 증권사 대신 인천에 있는 ‘미니 선물업체’를 찾았다. 식당 간판을 내건 사무실에는 업체가 자체 개발한 홈트레이딩시스템(HTS)이 깔린 수십 대의 PC가 놓여 있었다.

정부는 지난해 말부터 개인이 신규로 단순 선물거래만 해도 3000만 원 이상의 예탁금을 내고 사전교육 30시간, 모의거래 50시간을 받도록 규제를 강화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HTS 이용료 100만 원을 내면 거래가 가능했다. 대신 매일 거래를 청산해 수익금의 10~30%를 낸다. 이곳은 인가를 받지 않은 불법업체로 거래한 개인도 처벌받을 수 있다. 이 업체가 운영하는 사무실은 3, 4곳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금융감독원과 금융투자협회, 한국거래소는 2013년 인터넷상에서 선물계좌 대여업체, 미니 선물업체, 불법 FX마진업체 등 사이버 불법금융업체 1300여 곳을 적발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적발이 쉬운 인터넷카페 등 온라인 대신 오프라인으로만 회원을 모집하는 업체가 급증해 불법업체를 찾아내기가 어려워졌다.

정부의 잇단 규제로 시장의 건전성은 일정 부분 개선됐지만 시장 진입과 거래가 막혀버린 개인들이 불법업체를 찾으면서 음성적 거래가 확대되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김중흥 금융투자협회 파생상품지원실장은 “개인투자자를 보호한다고 규제를 쏟아냈는데 불법시장이 커지는 풍선효과가 발생하면서 오히려 투자자 보호는 퇴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국내 대신 해외로 가는 투자자도 늘어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국내 파생상품의 하루 평균 거래량은 2011년 1584만 건으로 사상 최대 규모였다. 이때까지 3년 연속 국내 파생상품 거래량은 세계 주요 거래소 중 1위였다.

하지만 2012년 하루 평균 거래량은 740만 건으로 반 토막 났고 올해는 24일 현재 283만 건으로 2011년보다 82% 이상 급감했다. 지난해 세계 순위도 11위로 추락했다.

특히 시장 진입이 어려워진 개인이 급속도로 줄었다. 파생상품 거래에서 개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2011년 25.6%에서 지난해 18.2%로 감소했다. 반면 외국인은 같은 기간 25.6%에서 38.7%로 늘었다. 파생상품 중 거래가 가장 많은 코스피200옵션은 외국인 비중이 55%나 된다. 김 실장은 “현물 주식시장의 등락에 대비한 헤지나 차익거래 목적으로 이용되는 게 파생상품 시장인데 특정 주체의 비중이 높으면 현물, 파생상품 시장 움직임이 왜곡될 수 있다”고 말했다.

거래가 어려운 국내 시장 대신 해외 파생상품 시장을 찾는 개인투자자도 크게 늘었다. 해외 파생상품은 그동안 기업이 많이 투자했지만 개인들까지 가세하면서 연간 거래금액은 2010년 4590억 달러에서 지난해 1조6560억 달러로 260% 증가했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자본시장실장은 “이는 불필요한 해외 자본유출을 늘리고 국내 시장을 더 위축시키는 결과를 낳는다”고 말했다.

정임수 기자 ims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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