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구제금융 신청 오늘로 꼭 15년… 3대 아이콘으로 본 한국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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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1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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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제일은행 ‘눈물의 비디오’… 마르지 않는 눈물
[2]금 모으기 운동… 외환 7위國 밑거름
[3]부실채권정리기금 활동 종료… 금융안정 효자 고마워!


1997년 11월 21일 대한민국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이는 국민들의 삶을 뿌리째 흔들어 놓았다. 내로라하는 재벌기업들이 잇따라 쓰러졌고, 직장인들은 하루아침에 거리로 내몰렸다.

제일은행 직원 4000여 명의 해직사태를 생생하게 담은 ‘눈물의 비디오’에 국민들은 눈시울을 붉혔지만 그해 12월 자발적으로 시작한 금 모으기 운동으로 외환위기를 극복하려는 한국인의 굳은 의지를 전 세계에 과시했다. 정부는 부실채권 상환기금을 만들어 환란 조기 극복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15년이 지난 2012년 한국 경제는 안정을 찾았지만 빈부격차 확대와 경제성장 동력 저하라는 새로운 숙제를 떠안았다.

외환위기 당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눈물의 비디오와 금 모으기 운동, 부실채권 상환기금의 현재 상황과 한국경제의 문제점 등을 짚어봤다.

○ ‘눈물의 비디오’ 그 후 15년

1998년 3월 서울 종로구 공평동 제일은행 본점에서 열린 행사에서 한 지점장 부인이 수많은 동료를 떠나보낸 남편을 생각하며 쓴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어 내려가자 행사장은 눈물바다가 됐다.
1998년 3월 서울 종로구 공평동 제일은행 본점에서 열린 행사에서 한 지점장 부인이 수많은 동료를 떠나보낸 남편을 생각하며 쓴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어 내려가자 행사장은 눈물바다가 됐다.
외환위기의 한파가 몰아친 1997년 겨울, 국민들은 8분 분량의 비디오테이프에 눈시울을 적셨다. ‘눈물의 비디오’(원제 ‘내일을 준비하며’)로 불린 이 영상물은 제일은행 직원들이 주인공이었다. 지점 통폐합에 따라 은행을 떠나야 할 상황에 몰린 서울 테헤란로 지점 직원들이 마지막까지 부실기업 처리 업무를 담담하게 하는 일상이 담겨 있다.

제일은행은 한보 기아 대우의 연쇄부도로 공적자금 1조5000억 원을 수혈 받았고, 대규모 예금 인출 사태를 겪었다. 직원 약 1만 명 중 4000여 명이 은행을 떠나 흩어졌다. ‘명예퇴직’이라는 단어도 이때 처음으로 언론에 등장했다. 이 영상물을 제작한 이응준 당시 제일은행 대리(42·개인사업)는 “출연한 여직원의 퉁퉁 부은 얼굴을 가리려고 모자이크를 해야 할 정도였다”며 “지금도 경제 상황이 어렵지만 외환위기를 극복한 힘으로 이제는 희망과 미래를 이야기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외환위기 이후 국내 시중은행들의 부침도 심했다. 제일은행은 2000년 1월 미국계 사모펀드인 뉴브리지캐피털로 인수된 뒤 2005년 4월 영국 스탠다드차타드(SC)은행을 새로운 주인으로 맞았다. 이 과정에서 이름도 SC제일은행으로 바뀌었다가 올해 1월 ‘제일’을 뺀 스탠다드차타드은행으로 최종 변경됐다. 한미은행도 미국계 사모펀드인 칼라일펀드를 거쳐 씨티그룹에 인수된 후 씨티은행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외환은행은 미국 텍사스에 기반을 둔 사모펀드인 론스타에 매각됐다가 올해 2월 하나금융지주의 품에 안겼다.

○ 20세기 판 국채보상운동 금 모으기

고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각계 지도자들이 1997년 말 ‘금 모으기 운동’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김 추기경은 금 십자가를 내놓았다. 동아일보DB
고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각계 지도자들이 1997년 말 ‘금 모으기 운동’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김 추기경은 금 십자가를 내놓았다. 동아일보DB
1997년 말 시작된 ‘금 모으기 운동’은 당시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90년 만에 재연됐다는 평가까지 받았다.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구국 운동의 형식을 띠었기 때문이다. 신혼부부의 결혼 반지와 돌 반지 등이 쏟아져 나왔고, 고 김수환 추기경은 금 십자가를 내놓았으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들은 자신이 딴 메달을 보내왔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당시 주택은행 등 5개 금융기관을 통해 총 225t(21억7000만 달러)의 금이 모였고, 이 중 시가 18억2000만 달러 상당의 금 196.3t이 해외로 팔렸다. 이는 외화 획득과 무역수지 흑자로 이어졌다. 1998년 2월 32억 달러의 무역흑자 가운데 10억5000만 달러가 금 수출로 얻어졌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1997년 12월 38억 달러에 불과했던 우리나라 외환보유액은 올 9월 말 기준 3220억 달러로 세계 7위 수준까지 올랐다.

그러나 금 모으기 운동을 주도했던 가계는 최근 몇 년 사이에 급증한 주택담보대출 등으로 현재 한국 경제를 위협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3월 말 현재 911조 원에 이르는 가계부채는 한국 경제를 위협하는 시한폭탄으로 인식될 정도다.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 잠재성장률은 반 토막이 났고, 분배 구조는 더욱 나빠졌다. 1997년 6.1%였던 우리나라의 잠재성장률은 올해 3.7%로 낮아진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 인구 중간소득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상대적 빈곤 인구의 비중도 같은 기간 8.7%에서 15.0%로 커졌다.

○ 부실채권정리기금 역사 속으로

공적자금 부채 조기상환의 효자 노릇을 했던 ‘부실채권정리기금’은 15년의 활동을 마치고 22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법정 운용 기한이 만료되기 때문이다.

1997년 11월 24일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에 설치된 부실채권정리기금은 국가보증부채권 발행, 회수자금 재사용, 정부와 금융회사의 공동 출연 등으로 마련한 39조2000억 원을 투입해 금융회사 부실채권 111조6000억 원을 인수했다. 그리고 9월 현재 투입액 39조2000억 원보다 7조 원가량이 초과된 46조7000억 원을 회수(회수율 118%)했다. 캠코 관계자는 “공적자금을 운용했던 외국의 공적자금 회수율이 50∼60%대인 점을 감안하면 성공사례라고 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공적자금 극대화 원칙에 치우쳐 부실기업 매각 속도가 지지부진했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외환위기를 겪은 지 15년이 지났지만 부실채권정리기금이 투입된 쌍용건설(38.8%), 대우조선해양(19.1%) 등의 지분을 매각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매각이 늦춰지면서 이들 기업에 대한 경영이 방만해지고 일부 기업은 수익성도 악화되고 있다. 주인 없는 회사의 폐단이 속속 드러나는 것이다. 캠코 측은 “헐값 매각 혹은 특혜 논란을 피하기 위해선 공적자금 회수 극대화 원칙을 우선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황진영·김유영·김상운 기자 buddy@donga.com
#IMF#부실채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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