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한국 20대, 日처럼 패배자들 급속 늘어 ‘충격’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0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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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 약자지만 열정이 더 뜨거운 그들, 다이내믹 코리아 이끌어
■ 한중일 3000명 ‘마음지도’ 조사

# 가을의 전설

일러스트레이션 최정미 디자이너 soo0313@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최정미 디자이너 soo0313@donga.com
1992년 10월 14일. 한국시리즈 5차전이 열린 잠실벌엔 내내 ‘부산갈매기’가 울려 퍼졌다. 롯데 자이언츠의 박동희가 9회말 마운드에 올랐다. 1차전 8이닝, 4차전 3과 3분의 1이닝을 던졌고, 이날도 벌써 4이닝을 넘긴 상황이었다. 1984년의 최동원에 비할 순 없더라도 그는 분명 투혼을 불사르고 있었다.

정규리그 3위 롯데는 준플레이오프에서 전통의 강호 삼성 라이온스(4위)를, 플레이오프에선 전년 우승팀 해태 타이거즈(2위)를 각각 2승과 3승 2패로 물리쳤다. 사기는 하늘을 찔렀지만, 모두가 “거기까지”라고 봤다. 선수들은 이미 지쳤고, 상대는 너무 강했다. 장종훈(41홈런·119타점)이 이끄는 빙그레 이글스는 그해 정규리그 최다승 기록(81승)을 세운 팀. 상대전적도 압도적 열세(5승 13패)였다. 부산 팬들은 롯데의 선전, 아니 기적을 빌었다. 다른 팬들도 그랬다. 약자에게 보내는 연민이라도 좋았고, 강자에 대한 질투라 해도 괜찮았다.

투아웃에 주자는 1루. 홈런 한 방이면 바로 동점이었다. 호흡을 가다듬은 박동희는 혼신의 힘을 다해 마지막 공을 뿌렸다. 7번 타자 양용모도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듯 매섭게 방망이를 돌렸다. 그러나 공은 내야를 벗어나지 못했다. 땅볼을 잡은 박정태가 2루 베이스를 직접 밟았다. 4 대 2로 롯데의 승리. 준플레이오프 진출팀 중 첫 한국시리즈 우승팀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절대강자가 무너진 한 편의 드라마에 사람들은 열광적으로 환호했다.

언더독(상대적 약자)을 둘러싼 사람들의 심리는 매우 복잡하다. 국적, 나이, 성, 직업에 따라서도 모두 다르다. 한국인은 중국인이나 일본인에 비해 ‘언더독 성향’(자신을 언더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강하고, 언더독 스토리에 대해서도 가장 우호적이다. 한국의 20대 여성은 ‘약점인식’이 매우 크지만 ‘열정의지’가 부족해 패배자형 언더독에 가깝다. 이상은 동아일보 주말섹션 ‘O₂’와 여준상 동국대 교수(경영학)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한중일 마음 지도’ 프로젝트에서 확인된 내용들이다. 한중일 3000명(20∼59세, 중국은 20∼49세)을 대상으로 한 이번 조사에는 대홍기획(콘텐츠 기획)과 마크로밀엠브레인(설문 실시)이 함께 참여했다.

○ 열정을 갖고 도전하는 약자

언더독 성향을 파악하기 위한 질문은 두 가지였다. ‘나는 다른 사람에 비해 약점이 많다고 생각한다’와 ‘나는 다른 사람보다 열정의지가 강하다고 생각한다’. 간략하게 말해 약점인식과 열정의지다. 두 질문 모두에 대해 평균 3점(이하 5점 척도 기준)이 넘으면 ‘언더독 성향’이 있는 것으로 봤다.

한국인의 약점인식은 3.32점, 열정의지는 3.34점이었다. 즉, “나는 약점이 많으나 이를 극복할 열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네루 파하리아 하버드대 연구원이 제시한 언더독 개념에 가장 가깝다. 중국인은 본인의 약점에 대한 인식은 낮은 반면 열정의지가 매우 높았다(3.17점, 3.79점). 일본인은 반대였다. 약점인식(3.31점)은 한국과 비슷하지만 열정의지(3.04점)가 아주 낮은 편이었다.

각 질문에 대한 동의응답(‘매우 그렇다’ 또는 ‘그렇다’)의 비율을 보면 비교가 더 쉽다. ‘나는 다른 사람에 비해 약점이 많다’에 대해 한국인(44.7%)과 일본인(40.9%)의 동의응답 비율이 높았던 반면, 중국인들의 응답(34.6%)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열정적이다’에 대해서는 중국인의 63.9%가 동의한 반면, 일본인은 같은 답변이 28.5%(한국 42.3%)밖에 되지 않았다. 한마디로 중국인은 열정의지가 너무 강한 ‘열정형 언더독’, 일본인은 자조적 성향이 짙은 ‘패배자형 언더독’이었다.

장경섭 서울대 교수(사회학)는 이 결과에 대해 “세 나라의 사회 분위기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비교한 3국의 차이점은 대략 이렇다. 일본은 한국이나 중국보다 훨씬 일찍 선진국 대열에 접어들었다. 지배질서가 공고화됐다는 뜻. 권력이나 자본을 갖춘 상위계층 사람들은 이미 ‘포화 상태’다. 그래서 대부분 ‘개인의 열정만으론 한계가 있다’는 명제를 ‘참’으로 받아들인다. 반면 한국의 현대사는 매우 다이내믹했다. 40대와 50대는 1960년대나 1970년대 초의 찢어지는 가난을 직접 경험했다. 동시에 사회의 성장과 함께 개인의 노력으로 상류층에 진출하는 사례들도 다수 목격했다. 태어날 때부터 경쟁체제에 돌입하는 한국인이 높은 열정의지를 보이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인 만큼 교육과 자본은 표준화된 방법으로 제공돼 왔다. 개개인의 약점인식이 상대적으로 낮은 이유다. 다만 이런 특징은 경제 개방과 함께 서서히 옅어지고 있다.
▼ 韓 20대, 日처럼 패배자형으로 급속 진행… 中은 열정형의 나라 ▼

중국인의 강한 열정의지는 1가구 1자녀 정책의 결과로도 볼 수 있다. 대홍기획 글로벌마케팅부문의 류쓰한(劉思含) 연구원(중국인)은 “현재의 20, 30대는 중국 정부의 강력한 산아제한 정책 이후 태어난 ‘소황제’ 세대”라며 “대부분 외동으로 자란 이들은 과도한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 있다”고 설명했다.

○ 패배감에 젖은 한국의 20대

문제는 진학, 취업, 결혼, 육아로 이어지는 연쇄적인 피로감으로 인해 한국 젊은이들의 열정의지가 실종되고 있다는 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인의 열정의지는 나이가 많을수록 오히려 높았다. 그나마 30대는 약점인식(3.31점)과 열정의지(3.32점)가 균형을 이루고 있지만 20대는 열정의지(3.20점)가 약점인식(3.31점)보다 낮았다. 이런 모습은 취업준비생들에게서 잘 드러난다. 인사업무만 13년째인 LG전자의 심성섭 부장은 “면접관들의 의견을 종합해 보면 최근의 지원자들은 전반적으로 목표의식이 뚜렷하지 못하고, 열정이나 집념도 이전 세대에 비해 약하다”며 “학력과 스펙도 스스로 쌓은 게 아니라 부모와 환경이 만들어준 것이란 인상이 짙다”고 말했다. 그는 기업에서 도전정신과 패기를 중시하다 보니 스스로 언더독임을 강조하려 하지만 70∼80%는 ‘억지’에 불과하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이것은 이 회사만의 현실은 아니다. 장 교수는 “외환위기 이후 젊은이들 사이에서 ‘체념’이 사회 분위기로 고착되고 있다”며 “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사회 시스템 자체가 개선되지 않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젊은 여성들의 진한 패배의식은 특히 더 걱정스럽다. 20대 여성의 열정의지(3.14점)는 약점의식(3.38점)을 한참이나 밑돌았다. 30대 여성도 열정의지(3.22점)가 약점인식(3.34점)보다 낮다. 바꿔 말하면 “약점이 많다는 생각을 하는데, 그것을 극복할 열정은 부족하다”는 것이다. 일본인과 같은 ‘패배자형 언더독’의 모습이다. 물론 일본의 20대는 더 심각하다. 20대 여성과 20대 남성의 열정의지는 2.90점과 2.98점으로 기준점인 3점 아래다. 언더독의 범위를 벗어나 패배자 영역에 포함된 것. 자칫하면 이것이 한국 젊은이들의 미래가 될 수도 있다.

이나영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현재의 20대는 입시와 취업이란 치열한 경쟁을 거쳐 왔지만, 제대로 된 성취감은 맛보지 못한 세대”라고 규정했다. 사회운동을 통해서라도 대리만족감을 얻었던 1980년대의 20대와는 또 다른 특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그는 “같은 20대라도 여성의 열정의지가 더 낮은 것은 사회·경제적 여건이 어려워질수록 여성이 더욱 불리한 위치에 서게 된다는 것 때문”이라며 “그런 상황에서는 남성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는 의존성이 생겨 자존감이 떨어질 가능성이 커진다”고 말했다. 그는 또 “최근 강력범죄나 성폭력 등으로 여성들의 불안심리가 더욱 확대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유정식 인퓨처컨설팅 대표는 “현재 20, 30대는 부모에 대한 의존도가 커서 ‘자기조직화’(자신이 처음부터 끝까지 완료하는 능력)가 부족하다”면서 “회사가 이들의 열정의지를 회복시키려면 최대한 자율성을 보장함으로써 자기완결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조언했다.

○ 언더독에 열광하는 이유들

한국인 중 ‘약점과 어려움을 열정으로 극복해 성공한 경우가 좋다’는 데 동의한, 즉 언더독의 성공 스토리를 좋아하는 이들은 무려 52.2%였다. 중국(44.2%)과 일본(35.6%)에 비해 선호도가 훨씬 높았다. 연령대별로는 20대(46.5%)나 30대(47.1%)보다는 40대(48.9%)와 50대(57.9%)가 더 큰 지지를 보냈다. 노동직(40.6%)에 비해 자영업자(63.2%)의 선호도가 높은 것도 눈에 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언더독을 응원할까.

첫째는 ‘공감’이다. 스스로 약자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다른 약자와 자연스럽게 일체감을 형성한다. 일부는 감정이입을 넘어 책임감마저 느낀다. 전형적인 언더독 성향의 한국인이 언더독에 대한 선호도가 높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더구나 한국은 일제강점기, 6·25전쟁, 보릿고개, 외환위기 등 치열한 현대사를 거쳐 선진국 대열에 올라선 ‘언더독 성공 스토리’의 표본이 아니던가. 하버드대 연구팀은 “언더독이 국가 아이덴티티와 맞아떨어지면 그 나라 국민에게서 언더독 효과가 더 강하게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실제 분석 결과 언더독 성향이 높을수록 언더독 성공 스토리를 더 선호한다는 사실이 입증됐다.

반대되는 주장도 있다. 탑독(상대적 강자)에 대한 반발심리로 언더독 효과가 나타난다는 해석이다. 미국 ‘티파티 패트리어츠’의 마이클 프렐은 ‘언더도그마’(지식갤러리·2012년)에서 “인간에게 보편적 특성이 있다면 그것은 성공한 사람에 대한 악의와 그를 정상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려는 열망이다”라고 했다. “나는 어떤 팀이든 뉴욕 양키스(메이저리그 최고의 명문구단)와 싸우는 팀을 좋아한다”는 말이 그런 맥락이다. 이는 약자의 편을 드는 게 결국 ‘정치적 행위’라는 풀이와도 연결된다. 프란스 드 발 미국 에머리대 교수의 ‘침팬지 폴리틱스’(바다출판사·2004년)를 보자. 서열 1위 침팬지를 견제하기 위해 2, 3위 침팬지가 연합하고, 1위에서 물러난 침팬지는 새로운

1위를 견제하려 자신을 몰아낸 다른 침팬지와 동맹을 맺는다. 전중환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진화심리학)는 “우위자와 열위자 간 다툼이 벌어질 때 사회구성원들은 열위자를 응원하거나 동맹을 맺음으로써 권력이 우위자에게 집중되는 것을 막으려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이번 조사에서는 한국인의 어떤 특성이 언더독을 사랑하는 마음과 연관되는지도 살펴봤다. 결론적으론 ‘행동을 취하기에 앞서 생각을 많이 한다’(평가지향), ‘의사결정 시 남들과의 상호관계에 초점을 맞춘다’(상호관계지향), ‘운명도 바뀔 수 있고, 모든 것은 변화하기 마련이다’(변화지향), ‘무엇을 하든 집중하여 빠져드는 경향이 강하다’(집중지향) 등의 경향이 있는 사람들이 언더독 스토리에 크게 공감했다. 반면 ‘일처리에 실수가 있더라도 만족하는 편’(만족지향)인 응답자들은 오히려 언더독에 반감을 가졌다.

또 ‘나는 현재 행복하다’(행복감)고 답한 사람들은 언더독 스토리를 좋아했지만 ‘나는 현재의 삶에 만족한다’(만족감)고 한 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여기서 언더독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행복해하지만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는 않는다는(도전하는 삶에서 행복을 느낀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 결과는 ‘약점을 극복하려 늘 도전한다’는 언더독의 진정한 의미를 곱씹게 한다. ‘행복학의 거장’ 대니얼 길버트 하버드대 교수(심리학)는 올 초 HBR(하버드비즈니스리뷰)에 실린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자신의 새로운 삶을 더 낫게 만들어줄 무언가를 찾아 나설 것이고, 결국 그러한 점을 찾을 것이며, 그것을 통해 행복해질 것이다.”

#도전의 계절

롯데는 2012년 10월 또 한 번 도전장을 내밀었다. ‘언더독 신화’를 이룬 지 꼭 20년 만이다. 올해 정규리그 4위에 그친 롯데는 3위 팀 두산 베어스와 만났다. 적진에서 펼쳐진 1, 2차전의 영웅은 팀 내 언더독(후보선수)이었던 박준서와 용덕한. 언더독이 직접 연출에 주연배우까지 맡은 터라 결말이 더 궁금해진다. 11일 3차전에선 두산이 반격에 성공했다. 두산도 2001년 3위로 정규리그를 마친 뒤 준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를 거쳐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경험이 있다. 약자의 반란을 완성했던 ‘유이(有二)’한 팀들이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셈이다. 깊어가는 가을밤, 언더독들의 혈투는 그래서 더 흥미롭다.

■ 언더독이란…

사회과학에서는 상대적 약자를 일컬어 ‘언더독(Underdog)’이라 한다. 투견장에서 위에서 짓누르는 개를 ‘탑독(Topdog)’, 아래에 깔린 개를 언더독이라 부른 데서 유래했다. ‘언더독 효과’는 약자가 성공하기를 바라는 심리나 그를 응원하는 행태를 말한다. 1992년 한국시리즈에서 롯데는 언더독, 빙그레는 탑독이었다. 당시 다른 팀 팬들마저 롯데를 응원한 것이 바로 언더독 효과라 할 수 있다.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자메이카 봅슬레이팀이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의족 스프린터 오스카 피스토리우스에게 찬사를 보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실제 1991년 미국 볼링그린주립대(오하이오 주)연구팀이 진행한 실험에서는 대학생 81%가 두개의 농구팀 중 누가봐도 열세인 쪽을 응원했다.

언더독의 열정을 통해 역경을 극복하는 스토리는 2,3차의 연쇄적 긍정 효과를 가져오는데, 이를 ‘언더독 스토리 효과’라 한다. ‘국가대표’(스키점프팀)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여자 핸드볼대표팀)등 실존 언더독을 그린 영화가 크게 성공한 이유다. 네루 파하리아 하버드대 연구원 등은 지난해 학술지 ‘소비자연구저널’에 언더독 효과에 관한 의미 있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들은 ‘열정지수’를 삽입해 언더독의 개념을 한 단계 더 세분화했다. 이에 따라 기존의 언더독은 ‘언더독’(고약점, 고열정)과 ‘패배자’(Victim·고약점, 저열정)로, 탑독은 ‘탑독’(저약점, 저열정)과 ‘특권적 성취자’(Privileged Achiever·저약점, 고열정)로 나누어졌다. 본 기사에서도 파하리아의 구분을 따랐다.

[채널A 영상] “당신네 싫다-우리도 싫다”가깝고도 먼 한중일 3국

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여준상 동국대 교수 marnia@dgu.edu
  
#언더독#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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